
디지털 환경에서 마이클 케나 사진에 나타난 지각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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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연구는 디지털 환경에서 변화하는 시각 경험을 마이클 케나의 사진을 중심으로 지각 경험의 특성을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을 이론적 틀로 삼아, 케나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지각의 재구성 과정을 첫 번째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 두 번째 살과 가시성의 교차, 세 번째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교차라는 세 가지 분석 프레임으로 규명하였다. 디지털 환경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방식의 변화를 통해 지각의 파편화를 초래해 왔으나, 케나의 사진은 장노출과 반복적 관찰을 매개로 시간성과 비가시적 차원을 가시화함으로써 감각과 기억이 결합된 지각 경험의 양상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케나의 작업을 바탕으로 디지털 환경과 구별되는 지각의 깊이를 고찰하고, 메를로-퐁티의 이론을 배경으로 사진적 지각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를 규명하였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perceptual experience in the photographs of Michael Kenna within the context of changing visual experience in the digital environment. Thus, it adopts Maurice Merleau-Ponty’s phenomenology of perception as a theoretical framework. Kenna’s photographs, characterized by long exposure and repetitive observation, reveal temporality and invisible dimensions, and can be understood as exemplifying a mode of perceptual experience in which sensation and memory are intertwined. In this context, the study examines the possibility of a form of perceptual experience that differs from that shaped by the digital environment, and interprets its significance based on Merleau-Ponty’s theory of perception. Ultimately, the study explores the ontological significance of photographic perception through Merleau-Ponty’s phenomenology, emphasizing a depth of perception distinct from that shaped by the digital environment.
Keywords:
Michael Kenna, Maurice Merleau-Ponty, Phenomenology of Perception, Digital Environment, Reconstruction of Perception키워드:
마이클 케나,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현상학, 디지털 환경, 지각의 재구성Ⅰ. 서 론
디지털화된 시대에서 스마트폰 중심으로 한 디지털 기반 매체의 확산은 시각 경험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는 이미지가 생성, 유통, 소비되는 방식이 실시간성과 반복성을 축으로 재편됨에 따라, 사용자의 인지 형태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본래 시각에 의한 정보 습득은 인간 인식 과정에서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시각체제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연계되어 인간의 ‘보는 방식’을 규정하고 지각 형성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논의되어 왔다[1]. 이미지 중심의 인식은 주체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검토되어 왔다[2]. 이미지는 더 이상 응시와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 정보로 소비되는 대상으로 기능하며 무수한 시각 이미지와 메시지가 동시적으로 유통되는 환경 속에서 지각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고 반복적으로 갱신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관찰된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지각 경험이 표면적 인식에 머무르고 감각적, 신체적 차원이 약화되는 문제를 야기한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시각 경험은 즉각적인 정보 처리, 반복적인 이미지 소비, 그리고 신체적 개입이 최소화된 지각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지각은 시간의 축적이나 신체적 경험이 수반되는 과정이 아닌, 빠르게 갱신되는 시각 정보의 인지 과정으로 재구성된다. 레브 마노비치(Lev Manovich)는 뉴미디어 객체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3],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가 인터페이스를 통해 선택되고 갱신되는 과정에서 경험된다는 점에서 시각 경험의 형성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가변성은 지각의 대상을 고정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는 데이터로 치환함으로써, 신체적 응시가 즉각적인 정보 처리로 대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지각의 파편화는 양적으로 이미지 수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매체의 기술적 조건에 의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양상을 띤다. 마노비치가 언급한 뉴미디어의 가변성은 이미지를 인터페이스 내에서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데이터 집합체로 치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지각은 대상을 향한 신체적 지향성보다는 알고리즘이 선별하여 제시하는 흐름 내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정보 처리 과정으로 변모할 여지가 존재한다. 즉, 스크린이라는 인터페이스 조건은 사용자의 감각을 표면적 시각에 고착시키며,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강조했던 신체적 개입을 통한 깊이의 체험을 기술적으로 배제하는 측면이 있다. 궁극적으로 디지털 매체는 지각을 신체와 세계의 상호작용이 아닌, 매끄러운 인터페이스 위에서 작동하는 부동의 인지적 수행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고찰된다. 이러한 지각의 재구성은 표면적인 디지털 매체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층위의 변화를 구분하고 판별하는 분석 기준으로 기능할 수 있다. 첫째, 기술적 층위에서의 가변성이다. 이는 이미지가 고정된 대상이 아닌 인터페이스 내 수치적 정보값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둘째, 인지적 층위에서의 정보 처리이다. 알고리즘적 선별에 의해 지각이 신체적 지향성을 상실하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변모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신체적 층위에서의 깊이 상실이다. 스크린 인터페이스가 메를로-퐁티적 의미의 신체적 개입을 배제하고 감각을 표면에 고착시키는 양상을 고찰한다. 이 기준들은 이후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의 사진 작업에서 나타나는 지각의 복원 지점을 포착하는 분석적 틀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이는 이미지가 수치와 언어적 요소로 분해, 환원되는 동시에 식별 가능한 정보체계로 재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한 박상우의 선행 연구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4], 이 매체적 변용은 신체적 응시가 즉각적인 정보 처리로 대체되는 결과를 야기한다. 결국 디지털 환경의 수치적 가변성이 신체적 지각을 파편화한다면, 케나의 작업은 장노출이라는 기술적 장치를 통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며, 이는 가시적인 것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안감’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기능한다. 시간성과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는 케나의 사진은 해당 환경에서 약화된 지각의 층위를 재고할 수 있는 유의미한 분석 대상으로 간주된다. 케나는 다양한 풍경에서 인간과 주변 환경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지각 경험을 강조하는 작가로 이해된다[5].
케나의 흑백 장노출 사진에 주목하여, 디지털 환경에서 변화하는 시각 경험과 구별되는 지각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그의 작업을 고찰한다. 또한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을 이론적 틀로 삼는다. ‘지각의 재구성’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지각 경험의 구조를 의미한다. 케나의 작업은 느린 노출과 절제된 화면 연출, 자연의 질서적 구조, 인공물의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공간적 장에서 시간 경험과 기억의 응축된 형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포착된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촬영 대상의 결과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시간의 흐름을 이미지에 축적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깊이감과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하는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제시된다. 앞서 언급한 형식적 특성은 관람자의 인식을 단순한 인지적 파악을 넘어,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지각 경험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각 경험의 심층적 구조를 규명하기 위해 메를로-퐁티는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을 기반으로 지각을 단순한 감각 작용이 아닌 실존적 사건으로 보았으며, 그의 살(flesh) 개념은 몸과 세계를 분리된 실체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관점을 넘어, 양자가 상호 침투하고 교차하는 존재의 장으로 파악된다.
본 논문은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을 통해 케나의 사진에 나타나는 지각 경험의 특성을 분석하고, 디지털 환경에서 변화하는 시각 경험과의 차이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케나의 장노출을 피상적인 물리적 시간의 기록이라는 기술적 특징에 국한하여 보지 않고, 메를로-퐁티가 후기 저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제시한 가시성의 이면으로서의 비가시성 개념[8]과 긴밀히 연결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기존 선행 연구들이 지각의 결과물에 집중하느라 간과했던 디지털 환경의 탈신체화 문제에 대한 현상학적 준거로서, 케나의 작업이 갖는 존재론적 의의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본고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시각 경험이 변화하였다는 전제에 머무르지 않고, 해당 변화가 지각의 작동 방식에 어떠한 구조적 차이를 발생시키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디지털 이미지 환경에서의 시각 경험의 특성을 선행 연구를 통해 도출하고, 이를 케나의 사진 작업에서 나타나는 지각 경험의 구조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양자 간의 차이를 논증할 것이다. 연구 방법론적으로는 문헌 연구와 작품 분석을 병행하는 질적 연구 방식을 따르며, 퐁티의 현상학적 개념들이 케나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체화되는지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결론적으로, 이미지 소비가 가속화되는 동시대 디지털 환경에서 케나의 작업은 파편화된 시각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쉬운 지각 경험의 깊이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현대적 의의를 확보한다.
Ⅱ. 메를로-퐁티의 지각 이론과 시각 경험
2-1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
메를로-퐁티는 체험을 중시하는 경험론과 사유를 강조하는 주지주의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지각을 단순한 감각의 문제로 환원하기보다는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 의해 발현되는 근본적인 경험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세계를 인간과 분리된 채 객관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자연주의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메를로-퐁티에게 지각은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경험이며, 체험하는 주체는 정신적으로 사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 속에 속해 있는 신체적 존재, 즉 몸의 주체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체는 단순히 물리적 대상에 그치지 않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세계를 지각하기 때문에 신체는 자연적 자아이자 지각의 주체로 간주된다[6].
몸적 주체로서 지각하는 주체는 사유하기 이전에 이미 몸에 의해 세계와 만나 경험하게 된다. 예컨대 차가운 물을 만지거나 공간을 가로지르는 바람을 느낄 때 지각의 주체는 바로 몸이다. 이처럼 몸이 세계와 만나 경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메를로-퐁티는 현상적 장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몸이 세계를 경험하는 살아있는 경험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현상적 장은 완전히 객관적인 세계도, 이성에 의해 성립된 세계도, 개인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세계도 아닌 채, 신체가 체험하고 지각하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적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상학적 세계란 순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경험들의 교차, 그리고 나의 경험들과 타자의 경험 사이의 상호 맞물림을 통한 교차에서 비쳐 드러나는 의미이다”[6].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메를로-퐁티는 완전한 환원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인간이 항상 신체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순수한 선험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후설은 지식과 경험, 상식에서 비롯된 선입견이나 개인적 감정 등을 괄호 치는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 변하지 않는 본질(eidos)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환원이 완전히 성취될 수 없다고 파악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이미 세계와 얽혀 있으며 신체적 주체로서 세계와의 관계 가운데 지각하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은 신체와 세계가 서로 얽혀 성립하는 지각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케나의 훗카이도 연작 중 한 작품인 ‘나무의 초상, 연구 1’과 래트클리프 발전소 연작의 ‘래트클리프 발전소, 연구 43’, ‘래트클리프 발전소, 연구 31’을 중심으로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이 사진 이미지에서 어떠한 지각 구조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2-2 살(Flesh) 개념과 가시성의 존재론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단편적인 하나의 의미로 통합된 대상만을 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물을 둘러싼 상황 전체를 함께 지각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사물은 그 주변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 현전하며 이와 같은 배경적 맥락을 메를로-퐁티는 지평(horiz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사물은 세계의 맥락과 지평을 통해 인식되며 그 의미 또한 생성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는 인간이 그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다”[7]. 이처럼 세계와 인간의 존재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상호 얽혀 있다.
지각 구조는 주체와 세계가 서로 분리된 관계에 그치지 않고 상호 얽혀 있음을 시사하며, 메를로-퐁티는 이 근원적 구조를 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살은 단순한 물질적 신체로 한정되지 않으며, 감각을 매개로 세계와 접촉하고 서로를 현현하게 하는 존재적 장을 의미한다. 살은 주체와 세계가 서로를 지각하고 감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얽힘의 구조로 인간과 세계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공속적으로 존재함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메를로-퐁티는 살과 세계의 관계를 언급한다. “보는 자로서의 나의 몸은 이 보이는 몸의 기반을 이루며, 보이는 몸과 함께 보이는 모든 것들의 기반을 이룬다. 이 양자 간에는 상호간의 삽입과 얽힘이 있다”[8].
예를 들어 손을 물에 담글 때 손이 물을 느끼는 것과 더불어 물 또한 손을 감싸며 영향을 준다. 몸이 세계를 느끼고 세계 역시 몸에 작용하는 관계는 일방향적인 데 그치지 않고, 상호적인 접촉의 구조를 구축하며, 상호 접촉이 형성되는 실천적 장을 메를로퐁티는 살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살의 장 속에서 현현하는 몸과 세계는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의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깊이를 지닌다. 인간은 사물을 볼 때 사물의 외형적 측면만을 지각하는 수준을 넘어 경험, 기억, 감각, 관계 등이 서로 얽히면서 의미가 발현되는 층을 함께 지각한다. 메를로-퐁티는 세잔(Paul Cézanne)의 회화를 자연과 몸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보이지 않는 의미의 층, 즉 세계의 깊이를 표현하는 작업으로 이해하였다.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색채를 공간성, 내용성, 다양성, 그리고 역동성으로 규명하며, 세잔이 공간으로 직접 파고들어 그 내부에서 존재의 견고함과 다양성을 발견하였다고 언급한다[9].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와 접촉하고 관계하면서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로 파악된다. 세계는 지각되고 몸으로 체험되며 대상과의 관계에서 경험된다. 우리가 보는 세계와 우리가 움직이며 행동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의 장에 놓여 있으며, 지각과 행동 또한 분리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경험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메를로-퐁티는 “가시적인 세계의 내부에서 가시적인 세계가 열리고, 그렇게 열리는 가시적인 세계가 자기 자신을 향해 열린다”[10]고 서술한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케나의 작품인 ‘수도원의 반영, 몽생미셸’, ‘두 개의 가로등, 폰다멘타 자테레’, ‘네 개의 말뚝과 세 개의 브리콜레’를 대상으로 신체와 세계가 서로 얽혀 발현되는 살의 존재론적 관계가 사진 이미지 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살의 개념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얽혀 나타나는 지각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적용되며, 이미지 내에서 구조화되는 관계적 구조를 규명하는 기준으로 기능한다.
2-3 가시성과 지각의 교차 구조
세계 속으로 자신의 살을 세계와 겹쳐 놓은 인간의 몸은 객관적인 주체가 환원될 수 없으며, 세계의 일부로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시각적 존재, 결국 보는 존재가 된다. 보는 존재이자 동시에 보이는 존재로서 인간은 세계를 보는 존재이지만 세계 가운데 다른 존재들에게 보이는 존재이기도 한다. 예컨대, 내가 나무를 보는 것과 더불어 나는 이 나무에 둘러싸인 하나의 형상으로 그 세계의 동일한 장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우리가 세계를 볼 때 우리의 몸 역시 세계 속에 자리하며 지각은 나와 세계가 공동으로 구성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세계 밖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을 넘어 몸을 매개로 세계와 얽혀 있으며 그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로 존재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서로 분리된 관계라기보다 동일한 가시성의 장 안에서 서로 교차하며 얽혀 있는 관계를 이룬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각기 서로에게서 차용하며 상대에게서 취하고 침범하여 서로 엇갈리고 상호 교차관계에 있다[6]고 메를로-퐁티는 언급한다.
인간은 보는 자와 보이는 존재로서 내면과 외부 사이에서 지속적인 교차(chiasm)의 접면에서 살아간다[11]. 세계와 몸 사이에는 경계선이라기보다 접촉면이 마련되고, 그 접촉면에서 신체는 자신을 현전하며 지각의 장에 노출된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세계가 단지 가시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감을 지니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차원은 어떤 부재의 방식으로 현존한다고[12] 지적한다. 따라서 보이는 것의 배후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차원이 함께 얽혀 있으며 비록 지금 눈에 직접 가시화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부재의 양태로 존재한다. 케나의 황산 연작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교차하며 나타나는 지각의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안개와 구름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가시화되는 산의 윤곽은 보이는 풍경과 보이지 않는 차원이 함께 얽혀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을 시사한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케나의 황산 연작을 토대로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지각의 구조를 살펴보고, 이에 근거하여 도출되는 시각적 경험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의 교차 구조는 케나의 연작에서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화면 위에 얽히며, 지각이 단일한 시각적 인식이 아닌 관계적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Ⅲ. 마이클 케나 사진의 지각 구조
3-1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과 공간 지각
본 절에서는 메를로-퐁티의 신체와 세계의 상호성 개념에 근거하여, 케나의 사진에서 포착되는 공간 지각의 구조를 고찰한다. 여기서 분석의 중요한 대조 기준은 수잔 손택(Susan Sontag)이 제기한 사진의 소유적 성격이다. 손택은 사진이 대상을 수집하고 소유하는 정보 지배적 방식임을 지적하였는데[13], 이는 피사체를 분절적인 데이터로 포착하는 디지털 방식의 시각 경험을 판별하는 유효한 척도로 기능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손택의 소유 중심적 지각 방식과 달리, 케나의 사진은 대상을 정보로 환원하여 소유하기보다 신체가 세계의 일부로 스며드는 지각적 경험을 우선시한다. 이는 낱낱이 피사체를 정보로 포착하는 디지털 방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얽히는 접촉의 구조를 구축한다. 이러한 지각적 얽힘의 미학은 작가의 작업 방식과 긴밀히 연결된다. 영국의 사진가 마이클 케나는 회화의 관심을 가졌던 작가로, 1970년대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풍경 사진의 잠재력을 발견하였다. 이후 70년대 말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애틀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주로 새벽이나 밤 시간에 최대 10시간에 이르는 장노출 촬영을 활용하여 정사각 포맷의 흑백 풍경에 자연과 대기의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케나의 장노출 기법은 지엽적인 시각적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는 기술적 선택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디지털 매체의 즉각적 반응이라는 속성과 대조를 이루며 단편적인 순간의 나열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함으로써 디지털 환경이 배제했던 지속의 지각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즉, 그의 작업은 인지적 수행으로서의 지각을 신체적, 시간적 깊이를 지닌 현상학적 경험으로 되돌리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으로 고찰된다.
케나는 인터뷰에서 “풍경사진가로 알려진 나는 왜 인물 사진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 한다. 하지만 나는 초상사진을 찍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나무일뿐이다”[14]라고 말한다. 그의 발언은 케나의 풍경 사진이 피상적인 자연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의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지각적 경험을 환기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을 세계-에로-존재로 보며 신체화된 코기토로서 인간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을 밝히고자 하였다[7].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케나는 다양한 위치에서 풍경을 관찰하고 반복적인 연구와 실험을 거쳐 최종적인 지점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시야를 규정하고 집중하며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한편 카메라의 기술적 설정을 결정한다. 또한 날씨, 기후, 계절과 같은 자연적 조건까지 고려하며 인화 단계에서는 자신이 풍경을 지각했던 경험에 따라 작품을 완성하며 케나의 내면적 시선이 스며든 이미지를 완성하게 된다[15].
케나의 훗카이도(Hokkaido) 연작은 인간의 모습이 직접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풍경을 바라보는 인간의 신체적 위치와 시선, 그리고 공간과 침묵의 경험을 구현하는 시리즈이다. 수년간의 일본을 여행하며 풍경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케나는 겨울 훗카이도의 하얀 설원과 얼음으로 뒤덮인 풍경, 잎을 잃은 나무들, 색채의 부재, 그리고 겨울의 고요함은 자연이 지닌 연약함과 덧없음을 환기하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지각적 관계를 연구한다.
케나는 일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비교적 개발이 덜 진행된 훗카이도 북동부에 한 호수 주변을 탐험하던 중 얼어붙은 도로에서 위험한 상황을 겪은 뒤 이 어린 나무들을 발견하였다. ‘나무의 초상, 연구 1(Tree Portrait, Study 1)’(그림 1) 사진 속 나무 뒤에 더 작은 나무가 위치해 있으며, 그 줄기의 그림자가 앞쪽 나무 뒤에 희미하게 비치면서, 앞쪽 나무는 실제보다 가지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16].
이 작품의 시각적 효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시선의 위치와 공간적 관계, 그리고 공간에 대한 감각적 체험 안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는 지각이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 의해 발현된다고 본 메를로-퐁티의 관점과 연결된다. “지각과 관련된 사항들은 지각하는 유기체의 바깥에 있는 상황이 원인이 되어 일방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가 자극들에 대해 자신의 구조에 따라 대응하면서 형성하는 흥분의 형태들을 인지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10]. 이는 단순한 시간의 표현을 넘어, 반복적 관찰과 공간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지각 경험의 구조를 보여준다. 지각은 외부 세계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만들어주는 것에 머무르기보다, 우리가 몸으로 자극에 반응하며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경험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각은 세계와 인간의 양방향적 관계 가운데에서 발현되며 이 작품 또한 그러한 관계에 기반하여 전개된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케나는 한 인터뷰에서 나무나 바다, 산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철강 공장, 원자력 발전소, 심지어 나치 강제수용소와도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우리는 모두 서로 나란히 존재하면서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존재들이라고 밝힌다[17]. 그의 발언은 신체를 바탕으로 세계와 향해 나아가며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한 메를로-퐁티의 관점과 긴밀히 연결된다.
순수한 자연의 형상을 담은 작품과 건축적 풍경이 담긴 작품이 병행되는 케나의 사진은 인간이 만든 산업 구조물이 밤, 안개, 빛, 물과 같은 자연적 요소와 결합하며 독특한 공간적 경험을 생성한다. 인간이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세계에 남겨진 흔적으로 포착된다. 그의 1980년대 작품인 래트클리프 발전소(Ratcliffe Power Station) 연작은 인간과 세계가 분리라는 관점을 넘어, 동일한 장 안에서 자연과 인공 구조물이 서로 얽혀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
영국 노팅엄셔(Nottinghamshire)에 위치한 래트클리프 발전소를 촬영한 이 연작은 20세기 중반 건설된 광범위한 산업 시설이 농촌 지역을 장악하며 산업 발전의 상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발전소의 기하하적 구조와 영국 전원의 풍경, 그리고 안개와 빛으로 만들어내는 대비는 산업 풍경에서도 미적 가치가 존재함을 제시하며 전통적인 자연 위주의 미 개념에 도전한다[18]
‘래트클리프 발전소, 연구 43번’(그림 2) 작품은 거대하고 위압적인 건축적 구조물과 대비되는 텅 빈 주변과 하늘의 풍경, 그리고 기차의 움직임은 케나의 장노출 기법을 활용하여 시간이 정지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시적인 표현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하나의 순간을 시각화하며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산업화가 남긴 지속적인 흔적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18].
케나의 작품에서 인간의 형상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인간이 만든 산업 구조물의 시간과 공간의 장을 구성하며 인간이 세계 밖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존재를 넘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신체적 존재임을 제시한다. 메를로-퐁티는 살아 있는 몸을 단순한 사유의 대상으로 환원하여서는 볼 수 없으며, 몸이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기능하는 존재로 작동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몸의 의미가 규정된다고 본다[10]. 이 점은 세계를 향해 자신을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보여주는 케나의 작품과도 닮아 있다.
메를로-퐁티는 환상지 현상에서 보여주는 신체 경험이 생리적 작용으로 국한될 수 없음을 설명한다. 예컨대 코카인에 마비된 상태에서도 환상지는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환상지가 말초 신경의 작용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환상지는 신체와 의식, 세계의 관계에 기반하여 고찰되어야 하는 살아 있는 몸의 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케나의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시적 이미지에 가까운 사진은 특정한 장소 자체를 재현하기보다 빛과 시간, 기억, 그리고 분위기를 강조하며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시각적 기억을 불러일으킨다[19]. 또한 케나의 연작인 ‘래트클리프 발전소, 연구 31번’(그림 3)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으로, 기하학적 형태의 발전소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공간적 지형성이 안개 낀 하늘의 대기와 결합하면서 정서적 균형 상태를 보여준다. 추상적이며 기이한 형상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케나의 개인적 경험과 감각이 사진이라는 예술적 매개로 표현된 사례로서, 주관적 지각 경험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즉각적이고 반복적인 시각 경험과 달리, 시간의 축적과 신체적 관여가 수반되는 지각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케나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흑백의 미묘한 계조와 인화지의 물리적 질감은 매끄러운 스크린 인터페이스가 제공하는 비물질적 시각 정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케나 사진의 촉각적 질감은 박상우가 지적한 수치적 정보값으로의 환원을 거부하며 관람자의 지각을 단순한 정보 인지의 차원을 넘어[4] 신체적 접촉의 층위로 되돌려 놓는 논증적 근거가 된다. 또한 케나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장노출은 기계적으로 물리적 시간을 기록하는 일차적 수단을 넘어, 메를로-퐁티가 강조한 살의 가역성이 발현되는 현상학적 장으로 기능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주체와 대상의 상호 침투를 통해 실존적 공간을 현현시키는 지각 현상학적 분석 틀을 따르고 있으며[11]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지 않는 비가시적 차원의 시간을 이미지 위에 중첩시킨다.
그의 장노출의 미학은 사진 이미지를 고정된 단면이 아닌 수용자의 의해 해석되는 하나의 ‘지속(duration)의 과정’으로 파악한 조소연(2009)의 선행 연구와 그 궤를 같이한다[20]. 작가가 셔터를 열어두고 대상을 마주하는 신체적 기다림의 시간은 촬영 대상인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시간과 장노출이라는 매개로 하여 서로 얽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지 않았던 비가시적 차원의 시간은 이미지의 평면 위에 겹겹이 쌓이며, ‘지각의 두께’로 변모한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의 즉각적이고 가변적인 소비 방식과 대조적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대상과의 실존적 얽힘을 회복하게 하며 비가시적인 존재를 가시화하는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198O년대 초 영국 북서부 산업 지역 촬영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하던 중 발전소를 발견한 케나는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불안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으며, 그 장소의 거대한 규모와 밤에 분출되는 강렬한 힘에 압도되었다고 전한다[17]. 메를로-퐁티는 “나와 모든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적 또는 기하학적 거리 저 너머에는, 체험된 거리가 있고, 이것은 내게 중요하고 내게 존재하는 사물들을 나와 연결하고, 사물들 사이에 연결한다. 이 거리는 매 순간 내 삶의 <폭>의 크기가 된다”[21]라고 제시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케나가 경험한 발전소의 공간은 물리적 거리로서의 대상이라기보다 인간의 신체적 경험과 정서적 반응에 따라 전개되는 체험된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세계가 객관적 대상으로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각 경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공간 현실임을 확인하게 한다.
3-2 살과 가시성의 교차
메를로-퐁티의 살 개념에 따라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지각의 구조를 규명함에 있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디지털 환경의 지각적 한계를 규정하는 비판적 준거로 작동한다. 보드리야르기 언급한 디지털 시뮬라크르의 매끈한 표면은[22] 신체적 개입이 소거된 채 부동의 인지만이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환경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 절에서는 상술한 디지털적 표면성과 대비되는 케나 사진의 촉각적 층위를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사진적 매체가 수치적 정보값을 넘어 존재의 살을 회복하는 지각적 깊이를 확보하는지 심층적으로 논증하고자 한다. 케나의 장노출은 시간의 층위를 이미지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림으로써 지각의 두께를 형성한다. 이는 매끄럽고 즉각적인 디지털 이미지의 휘발성을 거부하고, 만질 수 있는 실재로서의 살의 속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앞서 언급한 실존적 회복은 작가의 구체적인 작업 방식인 장노출에 의해 시각화된다. 케나의 개인적 시선과 사진적 탐구 열정이 반영되는 그의 작업은 어린 시절 경험한 풍경이 그에게 강한 시각적 인상과 향수를 남기며 작품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케나의 장노출 촬영은 시간의 흐름과 빛의 변화가 이미지에 구현되며, 그의 사진은 정지된 순간이라기보다 시간의 층위를 지닌 시각적 장면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암시한다[19]. 이는 단지 시간의 축적을 넘어, 대상이 놓이는 배경과 맥락을 확장함으로써 지각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케나의 몽생미셸(Mont St Michel) 풍경 연작은 물과 안개, 그리고 하늘이 건축물과 어우러지면서 마치 섬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사진 속 풍경은 가시성과 공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세계와 대상이 서로 얽혀 있는 지각적 관계를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지각 구조는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실존적 공간이 발현된다는 분석적 프레임을 따르고 있으며[11], 수면에 투영된 수도원의 형상은 실재와 가상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살의 가역성’을 가시화한다. 이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바로 앞에 위치한 작은 섬 몽생미셸에 케나는 수차례 머물며 관광객들이 떠난 뒤의 고요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대상의 외적 형태를 넘어선 실존적 상호작용을 포착해낸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연작 중 ‘수도원의 반영, 몽생미셸(Abbey Reflection, Mont St. Michel)(그림 4)은 물에 비친 수도원을 담아내며 수도원과 수면이 하나로 겹쳐지는 시각적 현상을 부각한다. 그는 시각에 깃든 신비를 불러일으키고 강조하는 요소들, 예컨대 해안의 사물을 비추는 수면, 기원을 알 수 없는 밝은 후광,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산과 건축물 등을 매개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15].
케나의 열린 시선에 의해 세계가 계시처럼 현현하듯, 그의 사진은 장소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시각적 매체와 감각이 투영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메를로-퐁티는 “회화는 항상 살엣 것 속에 있다”[10]고 말하며 살의 존재의 근본 원소이자 감각의 덩어리로 설명한다. 이는 회화가 세계의 근원적인 감각의 차원을 탐구하는 예술임을 의미한다. 케나의 사진 역시 세계와 감각, 그리고 지각이 서로 얽혀있는 살의 장을 바탕으로 발현된 시각적 경험의 성격을 지닌다.
케나는 수면에 비친 수도원의 이미지에 자신의 지각적 경험을 중첩시키며 사진적 기술과 체화된 신체를 기반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확장한다. 메를로-퐁티는 사물의 외적인 겉모습 자체보다 신체와 세계가 맺는 관계 속에서 사물의 본질이 발현되는 양상에 주목하며, 표면적 인식을 넘어 존재들 간의 얽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11]. 케나의 자연과 건축물은 화면 안에서 신체와 세계가 서로 얽힌 공통의 실재로 표현된다.
메를로-퐁티는 신체는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위치하는 차원을 넘어, 공간에 거주하며 세계와 관계 맺는 존재라고 언급한다[23]. 신체의 지향성은 신체와 세계가 맺는 지각적 지평을 형성한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케나의 사진은 깊은 감정, 개인적 기억, 그리고 감각이 투영된 지각적 경험의 장으로 나타난다.
케나의 사진은 장소의 흔적과 환경을 단편적인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경험한 장소의 분위기와 시간의 흐름, 나아가 기억의 층위가 절제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물과 안개, 수평선이 하나의 평면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연작에서 특히, 말뚝(piers)은 공간의 깊이를 구축하는 지각적 축으로 작용하며, 평면적인 이미지에 깊이가 생성되는 공간 구조를 시사한다. 밤에 촬영된 사진에서 물의 반사와 불빛은 더욱 섬세한 베네치아의 풍경을 연출하며, 그의 작품은 찬란했던 시대의 숭고한 건축물과 그 도시를 둘러싸고 침식하는 물 사이의 관계는 때로는 대립적이고 때로는 조화롭게 펼쳐진다[15]. 이는 디지털 환경의 시각 경험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성과 신체적 경험이 결합된 지각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중 ‘두 개의 가로등, 폰다멘타 자테레(Two Lamps, Fondamenta Zattere)’(그림 5)는 가로등 불빛의 번짐과 말뚝, 그리고 지평선을 중심으로 연출된 풍경이 고요한 평온함과 침묵을 재현하며 빛과 시간의 흐름이 이미지에 축적된 장면을 보여준다.
베네치아를 스무 번 이상 방문한 케나는 1980년 2월 어느 날 아침 배가 묶여 있지 않은 말뚝을 촬영하기 시작하며 그곳에서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빛과 어둠 사이에 포착된 한 장의 사진에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수평선을 따라 지나가는 배들의 선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이미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베네치아 사진 여정의 시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4]. 그의 경험은 말뚝과 자연이 이루는 공간적 관계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지각 속에서 깊이가 확인된다는 메를로-퐁티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살을 나라고 하는 이 감성적 존재와 내 안에서 감각되는 모든 것 사이의 불가분성(indivision), 즉 쾌감과 실재성의 연대성으로 정의한다[8]. 다시 말해 케나의 베네치아 말뚝 사진은 자연과 인공 구조물, 그것을 지각하는 신체가 서로 얽혀 구성되는 공간적 관계를 제시하며, 세계의 살 속에서 깊이가 생성되는 지각적 장을 구현한다. 사물의 외적 인식에 환원하지 않고 존재들 사이의 상호 얽힘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메를로-퐁티의 철학과 같이, 케나는 자신이 선택한 사물과 자연적 풍경이 렌즈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16년이 지난 후의 베네치아에서 촬영된 말뚝을 담은 작품에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지된다. 네 개의 말뚝이 크게 보이고 세 개의 목재 기둥이 원근에 따라 작아지는 구도를 갖는 이 작품은 ‘네 개의 말뚝과 세 개의 브리콜레(Four Poles and Three Bricole)’(그림 6)이다.
순간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발견하고 이끌어내는 창조적 과정에 가까운 케나의 작업은 기다림의 과정을 거쳐 단순한 형태로 절제된 이미지 안에서 인간이 그 장소와 관계를 맺어왔음을 암시하는 흔적을 환기한다[25]. 다시 말해 케나의 작업 과정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살’ 개념과의 관계 내에서 해석 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말하는 살은 물질이 아니다. 살이란 보는 몸 위로 보이는 것이 감기는 것이요, 촉각하는 몸 위로 촉각되는 것이 감기는 것이다”[8]라고 지적한다.
시간이 지나도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서로 다른 작품에는 케나의 시선을 거쳐 풍경과 시간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지며 그의 경험과 사유가 투영된다. 사진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밀도는 그의 정신적, 신체적 결합의 흔적이며 그의 감각과 실재가 중첩된 지각적 경험으로 생성된다. 구체적으로 16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말뚝의 형상은 관찰자의 시선 내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속의 과정’으로 파악된다. 지각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의 내포와 외연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며, 결국 사진적 표현은 내면적인 심층 세계로까지 침투하여[20] 평면적인 기록을 넘어선 의미론적인 상징성을 획득하게 된다.
3-3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교차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지각 구조를 통해, 케나의 황산 연작에 관찰되는 지각 경험을 고찰한다. 모든 이미지를 명확한 수치로 환원하여 가시화하려는 디지털 매체의 실증주의적 속성과 대조적으로, 케나는 안개나 산의 장노출이 만들어내는 흐릿함을 빌려 의도적으로 비가시적인 영역을 남겨둔다. 특히 “비가시적 실재가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퍼지기 시작한[26]” 지점에서 케나의 사진은 독특한 지위를 점한다. 그의 작업은 가시적 풍경과 비가시적 사유, 그리고 개인의 기억이 스며든 매체로서 독특한 화면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케나가 중국에 위치한 황산(黃山) 연작에서 보여주는 산은 구름과 안개에 둘러싸여 산의 윤곽이나 봉우리, 혹은 나무의 줄기가 부분적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안개와 구름, 공기에 파묻혀 사라지듯 풍경이 가시화된다. 케나가 포착한 이 장면은 풍경을 완전히 재현하기보다는 메를로-퐁티가 제시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얽히며 교차하는 지각의 상태를 환기한다. 케나의 시각은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실증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비각시적인 차원의 본질을 가시화하려는 ‘비가시성 미학’의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29].
대지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케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산을 촬영하며 고대 문인화가들의 수묵산수화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시각을 바탕으로 자연의 흐름과 인간 존재 사이의 리듬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27]. 그중 ‘황산 산맥, 연구 40(Huangshan Mountains, Study 40)’(그림 7)은 수 세기 동안 축적된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안개와 구름에 감싸인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경을 거쳐 황산이 지닌 고요한 정서적 분위기를 전달한다.
산의 윤곽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지각하게 하며, 이때 풍경은 보이는 일차적인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의 감각에 의해 성립되는 지각의 장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또한 케나 역시 보는 자로서 산을 바라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자신의 지각을 사진으로 남기고, 이 과정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풍경은 서로 얽히며 관계를 맺는다. 보이는 풍경은 외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 스스로 모습을 부상시키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조광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봄이 그렇게 자신을 최대한 희생할 때, 바로 그때 비로소 보이는 것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 보이는 것을 넘어서서, 저 내부에서부터 자신을 한껏 ‘밀어 올려’ 자신을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그것, 즉 그 본래의 완연한 사물인 것입니다”[10].
케나는 황산에서 촬영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기후와 강한 비, 짙은 안개, 그리고 추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며, 이는 그의 작업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준다[27]. 그의 이러한 행위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지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부각한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만질 수 있는 것 사이의 상호간 교류를 통해 가시성과 촉각성이 성립한다고[8] 언급한다.
구름이 산을 감싸며 그 모습을 감추는 케나의 작품은 관람자에게 낯선 세계의 파편을 제시하며, 마치 오랜 시간의 흐름을 견뎌 온 어떤 신이 그곳에 거주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한다[25]. 산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과 그 옆의 나무들은 하늘과 연결되는 듯한 공간적 흐름을 연출하며, 나무의 가지들은 곳곳에서 안개에 에워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장면이 포착된 작품이 바로 ‘황산 산맥, 연구 20(Huangshan Mountains, Study 20)’(그림 8)이다.
그의 사진 속 풍경은 인간의 부재를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흔적이 은연중에 침투해 있는 장면으로 구성된다[25]. 인화 과정에서 진행되는 깊이 있는 작업의 결과로 관람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긴다. 메를로-퐁티 철학에서 예술은 감각적 매체에 의해 존재의 살이 현현하는 장으로 간주되며, 케나의 사진 역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교차하는 지각의 장으로서 존재의 깊이를 환기한다. 박상우에 따르면 비가시성의 미학은 가시적 광선이 도달하지 못하는 사물의 심연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지각 방식을 상대화한다[26]. 앞선 논의에 근거하여 안개 속에 가려진 케나의 나무들은 풍경의 일부를 지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람자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부분을 능동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만약 디지털 알고리즘이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가시화하여 제시하는 것에 치중한다면, 케나의 여백은 비가시성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킴으로써 알고리즘적 정보 습득의 효율성을 반박한다. 이는 지각이 메를로-퐁티가 말한 비가시적인 이면을 신체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실존적 사건임을 반증하는 논증적 사례가 된다. 케나의 안개와 구름 역시 산의 외관을 지우는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신비로운 존재감을 가시화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표면적 인식을 넘어선 존재의 살과 마주하게 한다. 따라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완전한 일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양자는 서로를 차용하고 침범하는 가운데 엇갈림과 교차의 관계 속에서 지각이 형성된다[8].
케나의 작업에서 중요한 점은 대상과 그가 맺는 관계를 시각화하는 데 있으며, 이는 장소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 장소가 자신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제시한다[28]. 이 지각 방식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시각 경험과 구별되며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지각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러한 지각 방식은 이미지의 소비적 성격을 강조한 장 보드리야르의 논의와 대비되며, 정보 소비 중심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환경의 시각 경험과는 구별된다. 또한 손택은 사진이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케나의 작업이 재현을 넘어 감각과 경험이 결합된 지각의 형성을 지향함을 시사한다.
Ⅳ. 디지털 이미지 환경과 지각 경험의 재구성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을 급격하게 변화시켰으며, 시각 경험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1세기 현대 이미지는 다양한 매체와 플랫폼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공유되며, 그 소비 또한 즉각적이고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디지털 이미지는 불개연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반복적인 흐름에서 점차 개연적인 것으로 인식되며 수용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2]. 이와 같은 환경에서 인간의 시각과 지각적 경험은 점차 빠른 속도와 표면적 인식에 기반한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다.
손택이 지적했든, 사진 이미지가 현실 경험을 선취하고 대체함에 따라 대상에 대한 감각적 밀도는 약화되며 지각은 심미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13]. 상기한 디지털적 즉각성과 대조적으로, 케나의 작업은 최대 10시간에 이르는 장노출에 의해 의도적으로 시각적 소비를 지연시킨다. 이는 손택이 우려한 파편화된 이미지 소비를 넘어, 대상과 신체가 장시간 대면하며 세계의 일부로 스며드는 ‘지속의 지각’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고찰된다. 손택에 따르면, 사진은 현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특정한 순간을 포착하며 이 과정에서 경험을 심미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고 보았다. 사진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새롭게 규정하며 반복적인 이미지 소비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적 경험을 점차 약화시킬 수 있다. 손택은 “사진은 일종의 파편일 뿐이기에, 그 도덕적·정서적 중요성은 사진이 어디에 삽입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13]고 언급하며, 이미지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고 현실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결국, 이미지의 증가는 정보의 확장을 넘어, 경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손택은 카메라가 대상과의 거리와 인식을 재구성하는 장치임을 강조하며, “옳고 그름의 구분이 없는 한 쌍의 쌍안경처럼 카메라는 이국적인 사물을 가까이에서 느끼게 하고 친근하게 해주기도 하면서, 친근한 사물을 작고 추상적이며 낯설고 훨씬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13]고 보았다. 상술한 손택의 비판적 고찰에 비추어 볼 때, 케나의 작업은 일련의 경험적 선취와 감각적 약화 현상에 저항하는 지각적 실천으로 파악된다.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을 해체하여 심미적으로 소비하게 한다면, 케나는 장시간의 노출과 촉각적 물성을 통해 해체된 감각을 다시금 신체적 현존과 시간적 지속의 층위로 되돌려 놓는다. 이는 이미지에 의한 현실 대체어 맞서, 직접적인 감각 경험의 강도를 회복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대체하는 시뮬라크르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원본 없이 스스로 순환하는 복제로서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실재를 참조하지 않으며, 소비사회에서 실재보다 더 강한 현실 효과를 생산함으로써 기존의 재현 체제와 위계질서를 해체한다[22]. 상술한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볼 때, 디지털 환경의 시각 경험은 점차 비물질적이고 탈맥락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며, 사물의 의미는 이미지들 간의 상호작용과 기호의 순환 자체로 치환된다. 이는 지각이 구체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잃고 매끈한 인터페이스 표면 위에서만 표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탈체화된 시각 경험에 맞서, 케나의 사진은 은염 인화의 물리적 질감과 미묘한 흑백 계조를 통해 이미지에 신체적 부피를 부여한다. 이는 표피적인 시각적 재현에 머무는 디지털 시뮬라크르와 달리, 몸과 세계가 상호 접촉하고 얽히는 메를로-퐁티의 육화된 지각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케나의 작업은 수치적 정보값으로 환원된 디지털 이미지를 넘어, 존재의 살을 회복하고 지각의 깊이를 확보하려는 사진적 논증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이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가시화하는 데이터적 지각을 강화한다면 케나의 사진은 여백과 안개를 활용하여 비가시성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이는 가시적 광선을 넘어선 사물의 심연을 드러내는 작업이며[4], 지각이 표면적인 정보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을 신체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실존적 사건임을 입증한다. 이처럼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교차하는 지각 구조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노출하려는 디지털 환경의 효율 중심적 시각 경험에 대한 본질적인 반증이 된다.
궁극적으로 과거에 신체적 개입과 상호작용을 필요로 했던 인지적 수행이 스크린 터치나 입력과 같은 최소한의 행위로 대체되고 있는 현실에서[29]. 케나의 사진은 상실된 지각의 깊이를 복원하려는 존재론적 저항의 양상으로 파악된다. 이는 표피적인 시각적 인식에 머무는 동시대 지각 경험과는 다른 층위의 양상이며 시간의 흐름과 기억, 자연이 변화가 결합된 복합적 지각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지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Ⅴ. 결 론
본 연구는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을 분석틀로 삼아 마이클 케나의 사진이 지닌 지각 구조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 디지털 매체 환경에서 소실되어가는 시각 경험의 본질을 고찰하였다. 연구 결과, 케나의 사진은 일차원적인 풍경의 재현을 넘어, 신체와 세계가 상호 교차하는 ‘지각의 장’을 구축함으로써 지각이 단순한 감각 작용을 넘어 존재론적 사건으로 기능함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의 학술적 차별성과 기여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케나 연구가 주로 작가론적 관점이나 미학적 양식 분석에 치중했던 것과 달리,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개념인 살, 지평, 교차를 실제 작품 분석의 구체적인 분석 프레임으로 전환하여 매개하였다. 즉, 케나의 장노출 기법이 지닌 시간성과 흐릿함의 미학을 지각의 두께와 비가시성이라는 현상학적 층위에서 새롭게 해석해 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둘째, 현대 디지털 이미지 환경과 대비되는 사진적 지각의 존재론적 의미를 규명하였다. 가시적인 데이터로 치환하는 디지털 시뮬라크르의 매끈한 표면과 달리, 비가시적 본질을 가시화하는 케나의 작업이 체화된 지각을 회복할 수 있는 미학적 대안임을 논증하였다. 이는 파편화된 현대인의 시각 경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공하며, 이미지와 지각의 관계를 탐색하는 새로운 해석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이 동시대 시각예술을 분석하는 유효한 틀임을 재확인하였으며, 이미지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시각 경험의 깊이를 재고할 수 있는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케나의 사진을 바탕으로 규명한 지각의 구조는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사진적 지각의 존재론적 의미를 시사한다.
향후 연구에서는 분석의 범위를 동시대 타 작가들로 확장하여 사진적 지각의 보편적 가치를 더욱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논의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인간 중심의 체화된 경험을 설계하는 데 실천적인 시사점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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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2014년: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MA)
2011년:Pratt Institute (MFA)
2024년~현 재: 국민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관심분야:사진, 영상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