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성의 아날로그 구현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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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코로나 창궐 이후 비대면 수업에서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세계에 대한 희구와 실천이 무분별하게 순서 없이 진행된 모습이 있었다. 디지털 신기술은 활용에 대한 목적성에 기반하여야 하고 그 논리성과 세계관에 관한 차분한 천착에 기반해야 하지만 메타버스와 관련한 기술은 이러한 학습 없이 곧바로 비즈니스의 형태로 교육계에 이식되다시피 했다. 그 결과 가상현실은 단순히 ‘가장 현실’이나 ‘대리현실’로 이해되기도 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요새 주목받는 디지털 가상세계 구현의 양상이 이미 인류의 삶 속에 꽤 오랜 역사를 지닌 비(非) 디지털적 문화에서 시작했음을 밝히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동양과 서양의 예술과 철학에서 보이는 아날로그 방법을 통한 가상세계성을 규명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속 문화를 아날로그 가상세계 차원에서 바라보고 나서 디지털 가상세계의 구현을 위한 기술을 습득할 때 비로소 미래 사회가 구현해 내려는 디지털 가상세계가 갖는 현실 속 삶의 한 영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The desire and practice for the virtual world represented by the metaverse proceeded indiscriminately and without order in non-face-to-face classes after the outbreak of COVID-19. New digital technologies should be based on utilization and its logic and worldview, but the technology related to the metaverse was transplanted into the education world in the form of business without such learning. Therefore, virtual reality was simply understood as “imaginary reality” or “surrogate reality.” This study aims to reveal that the aspect of realizing a digital virtual world attracting attention these days has started in the non-digital culture that has a long history in human life. Therefore, the virtual world found in Eastern and Western art and philosophy is investigated using the analog method. Thus, when we consider the analog virtual world and then acquire the technology for realizing the digital virtual world, we recognize the identity of the digital virtual world that the future society is trying to realize as a realm of life.
Keywords:
Nature of Virtual World, Art, Philosophy, Analog Virtual World, Digital Virtual World키워드:
가상세계성, 예술, 철학, 아날로그 가상세계, 디지털 가상세계Ⅰ. 서 론
인류의 가상세계에 대한 열망은 최근의 것이 아니다. 이미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 해왔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사냥감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투영된 바를 확인할 수 있다. 현실을 초월하는 인간의 희망은 이렇듯 상상을 통해 가상으로 드러났음이다. 현실(universe)을 초월(meta)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메타버스가 대표적으로 디지털 시대인 최근 들어서야 코로나가 닫아버린 세상 속에서 대면 만남의 대안으로 급부상했지만, 디지털 세계는 메타버스를 디지털 성질의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존재 자체가 가상인 예술계도 가상세계성에로의 접근에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가상세계(활용) 교육이 단순히 몇몇 상업적 디지털 플랫폼 교수법에 머물렀고 현실 세상 속 가상현실은 오히려 가상세계성이 확대될 수 있던 시절을 후퇴시키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기술 활용의 당위성을 포함하지 못하는 가상세계 활용 교육은 메타버스 플랫폼은 웹 기반 전자적 현실계 모방 세계로 치부되어 쓰지 않아도 무리 없는 것(곳)이 될 수도 있다[1]. 작금의 메타버스의 판은 어떠한 철학적 학습이 반영된 것도 아니며 사회적인 의견이 차근히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기술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휘몰아침에 어쩔 수 없이 우겨 넣어진 ‘가장 현실’에 가깝다[2].
첨단 산업 사회일수록 기술을 활용하는 사용자가 일단 구현하려는 세계의 모습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면 그새 진보한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 기법에 버금가게 사용법이 쉬워져 기술이라기보다는 리터러시에 가까워진다. 대표적인 예로 챗 지피티(Chat GPT)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가상세계의 디지털 기술적 구현이 지금까지 인류가 아날로그 기법으로 해오던 많은 가상세계성의 투영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결과물을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서 실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는 인식이 세워지고 나면 가상세계의 디지털 기술 활용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지고 결과적으로는 가상세계성을 이용한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세워질 것이다. 자연어를 통해 원하는 이미지를 인공지능이 자동 생성하는 미드저니 베타(Midjourney Beta),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크레욘(Craiyon), 나이트카페(NightCafe), 드림 스튜디오(Dream Studio) 등의 소프트웨어와 챗 지피티 등의 가시적 기술의 진보는 디지털 기술의 활용 가치를 더 높이고 사용에 있어 방해 요소는 줄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가상세계성을 향한 인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천착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이 있고 나서 디지털 기술로 자신의 가상세계성을 구현하게 될 때 가상세계 활용 교육은 사고의 활동이 된다[3]. 역사 속 인류의 가상세계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가상세계 구현에 있어 디지털 기술의 활용에 명확한 정체성을 부여해줄 뿐만 아니라 기술 활용의 익명성, 강제성, 억지스러움을 완화해준다. 가상세계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늘 인류의 곁에 있던 개념이었고, 이를 구현하는 데에 디지털 기술이 필수조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 가상세계 활용과 그 교육에 있어서 구현에 필요한 디지털 기술에만 몰두하는 양상에서 탈피하여 가상세계 구현에 필요한 사고를 하는 교육적 환경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과연 가상세계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만 구현되는가?’라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가상세계성을 예술 철학에서 찾는다. 예술은 재현과 구현의 영역에 존재한다. 이는 기술이 먼저가 아닌 상상과 사고가 선행되는 곳이다. 디지털 기술과 가상세계성이 일원화되다시피 한 지금 이를 반추해볼 수 있는 곳이다. 우선 디지털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의 국내·외 예술 기법에서 찾아 철학적 해석을 적용하여 예술과 가상세계성의 상관관계 속에서 가상세계 구현의 양상과 원리를 아날로그적으로 규명한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가상세계 구현의 열망과 기술이 최근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메타버스와 그 플랫폼 활용의 여파가 아니라 오랜 역사가 있는 인류의 문화와 예술의 정체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목적을 갖는다. 즉, 가상세계의 아날로그적 구현 현상이 인류의 보편성임을 밝혀 인류문화의 한 면으로 그 명맥이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오고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4]. 가상세계의 발생 배경이 우리의 삶에 언제나 존재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가상세계 구현을 위한 기술 활용의 맹목성에서 오는 막연함과 난해함을 없애고 디지털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확산하고 가상세계 구현 기술 적용의 시작점을 마련한다는 데에 이번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Ⅱ. 가상세계성과 예술
2-1 가상세계성
현대에 들어 디지털 가상세계가 나타남에 따라 가상세계의 성격을 디지털 공간에 한정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가상세계의 성격은 아날로그로도 나타나고 실제로 먼저 발생했다. 현대에 들어 가상세계성과 디지털과의 관계를 필요충분조건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가상세계 구현에 있어 디지털 기술이 과도하게 집중된 결과 가상세계는 반드시 디지털로 구현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굳어진 듯하다. 오늘날 가상세계에 대한 정의도 그러하다[5]. 그러나 가상세계라는 것은 현실의 실제와 똑같이 따라 만들어 보는 모의(模擬)의 것으로 디지털 시대 이전부터 아날로그 구현체에서도 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술에는 가상세계적 존재론이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를 모방하나 실제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인 예술의 가상세계가 지각대상의 또 하나의 영역이 된 것이다. 존재의 영역이 비실제적인 것으로 확대된 예술 영역은 ‘지금’과 ‘이곳’이라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감각적인 대상은 아니지만, 그 영역은 지각 이후의 의식 활동을 촉발하기 때문에 소여(Gegebenheit)라고 할 수 있고[6] 따라서 아날로그 예술 기법과 디지털 기술은 모두 실제를 생산하는 탈실제(wirklichkeitserzeugende Entwirklichung)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법론의 아날로그적 접근은 그림, 글, 조각, 조형 등이 있고, 디지털적 시도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라이프 로깅(Life logging) 등이 있는데, 가상현실, 증강현실, 디지털 트윈은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통한 착각 현상을 바탕으로 하므로 컴퓨터를 사용했을 때와 아닐 때 그 정교함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가상의 것이 나타나 느껴진다는 점에 있어서 결과적 현상은 같다고 볼 수 있다. 단, 디지털 장치를 통하면 가상의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에서처럼 어떤 행위를 조작하고 실행하고 합칠 수 있다.
따라서 광의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근본적 역량은 컴퓨터 기술이라기보다는 ‘얼마나 상상의 실재를 실제적으로 잘 내러티브하는가’에 달려있다. 즉, 서사의 세계를 하나의 가능 세계(possible world)로 보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상상력에 접근하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7]. 상상력의 활동력에서 오는 표상이 어느 개념에 놓일 때 이 표상은 개념을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고, 상상력은 대상-지성-표상으로 순환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므로[8] 결국 가상세계는 ‘마치 진짜 같은’이라는 메타포가 존재하는 공간이다[9]. 그러나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 ‘있을 법한’ 곳으로 착각을 시발점으로 삼고 현실의 ‘내가 있는 곳으로 확장’된 공간 혹은 ‘내가 있는 곳으로 당겨온’ 공간이다. 이러한 확장성은 아날로그보다 디지털이 더 셀 수밖에 없다. 가상세계는 탈경계가 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몸의 탈물질화, 확장, 그리고 변이는 디지털 기술이 더 정교하게 만들어서 마치 내가 있는 현실과의 경계 구분을 정교히 포개는 은유적 방법의 역할을 정밀하게 하기 때문이다[10]. 또한 예술의 영역도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하게 되면 가상적인 수용자의 몸 역시 가상현실 예술의 가상성을 구성하므로 현실성이 높아진 가상세계성이 나타난다. 이것이 기존 예술의 가상성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11]. 결론적으로 가상세계성이라는 개념은 컴퓨터 산업의 발달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상세계성은 물질의 매개 없이 활동적인 힘을 갖거나 혹은 이에 관계하는 것으로 한 사물의 존재론적 그리고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구분을 위해 쓰일 수 있다. 문학도 가상세계성을 매개로 하는 영역이나 디지털 기술이 없었을 때 가장 정밀하게 시각적으로 가상세계성을 구현한 방법은 아날로그 예술 기법이었다.
2-2 이념의 가상
단순히 심미적 영역에서만 바라보던 예술로서의 그림을 가상세계의 실현성을 일으키는 시각적 이미지 제작 기법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가상세계성을 발생시키는 기제로서의 회화 기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 장르에서 가상세계성은 창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데 “철학자들의 가상에 관한 사유는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를 보여주긴 하지만, 가상은 넓은 의미에서 ‘창조’와 ‘해결책’이라는 개념을 수반하고 있다. 요약 정리해 보면, 가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니며 ‘창조 과정을 확장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것(들뢰즈), 도래할 미래에 ‘창조’되어야 할 ‘대안적 세계’(플루서), 새로운 세계로서 ‘현실이나 실재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보드리야르)으로 규정되고 있다.”[12] 예술에 대한 가상세계성을 철학으로 풀어보기 위해 칸트는 예술의 가상적 진리 역시 본질적 존재론 개념을 가지며 가상을 초월적 가상, 경험적 가상, 논리적 가상으로 구분했고 미감적 상상력의 활동 결과 나타나는 표상은 그만의 방식으로 존재적 진리를 개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3]. 이러한 예술의 가상세계성에 관한 주장은 니체와 헤겔에 의해서 제기되기도 했는데, 니체에게 가상은 예술에서의 미적 가상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삶과 문화를 생성하는 가상의 작용 전체를 의미한다[14]. 헤겔 역시 예술적 가상에 대한 철학을 견고히 했고 이를 통해 가상-본질의 이원론을 해체한 결과 예술은 이념의 가상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15]. 따라서 이들의 철학에서 예술적 가상인 이미지 구현 기법에는 가상세계성이 이미 내포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데리다 역시 없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가상세계의 이미지를 긍정하는 철학을 추구했다[16].
이념의 가상세계성은 동양의 전통 산수화의 와유(臥遊) 화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와유란 젊어서 다녀온 곳을 그려 놓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그림을 보아가며 그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개념으로 현실적으로 찾아갈 수 없는 자연을 즐기는 간접적인 추체험 방법이다. 이 개념은 중국 남북조시대 화가 종병(宗炳)의 화론서인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처음 등장했고, 북송의 곽희, 동기창, 석도를 지나 보편화되었다. 내가 갈 수 없는 공간을 ‘내가 있는 곳으로 당겨온다’라는 와유의 목적은 가상세계 창조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가상세계성의 철학을 기반으로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을 가상으로 나에게 확장한 성격의 세계가 되었고,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
동양에서 와유는 그림, 글, 건축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분히 이념적이었는데 조선 사대부들은 현실 속 정치적 갈등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공간으로 진취(進就)와 퇴은(退隱)의 모순된 이중심리를 중은(中隱)의 형태로 합리화시켰고 이런 이유로 현실에서의 실재와 가상에서의 실재를 포개어 놓은 산수화를 즐겼다. 비록 몸은 현실 세계에 있지만 확장된 또 다른 가상의 공간이 현재의 공간과 포개져 또 다른 시·공간 속에 ‘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와유로서의 산수화는 단순히 미술 감상법이 아닌 가상세계 속에서 관념론적 사유를 밝힐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17]. 산수 유람에 관한 시문을 모아 편찬한 일종의 기행문인 와유록(臥遊錄)도 유행했는데, 와유록은 독자에게 간접적으로 ‘실제 유람하는 느낌’이 나게 하는 역할을 했으므로 그 목적과 실현에 가상세계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프라인 여행 활동이 불가능했던 이들의 열망을 대리 충족하기 위해서 17세기 이후 유람이 붐을 이루었을 때 사실적 유람기록의 작성이 전문화되었고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의 제작이 급증했다[18].
Ⅲ. 가상세계성의 아날로그 구현 양상
3-1 회화의 가상세계성
아날로그 방법을 이용한 가상세계성의 발현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서는 회화 기법인 아나모픽(anamorphic) 원근법, 부감법(俯瞰法), 조형 등을 들 수 있다. 시각적 착시현상은 새로운 공간 확장의 조형적 표현, 더 나아가 가상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19]. 서양의 대표적인 아나모픽 작품인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그림 1 하단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이 해골은 시각적인 착시의 하나로 그림을 오른쪽의 높은 곳 또는 왼쪽의 낮은 곳에서 보아야만 해골로 보인다.
이는 물리적 리얼리티를 수정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기하학적 구조상에서 자체적으로 거리의 변화를 주고 색채의 변화를 줄 수 있어 독자적으로 요소로서 기능함으로써 가상세계의 성격을 갖는다[20].
또 다른 서양 중세의 대표적 아나모픽 작품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 성당(Chiesa di Sant'Ignazio di Loyola a Campo Marzio)의 천장화다. 작가 안드레아 포초(Andrea Pozzo)는 성당 천장에 실제로는 없는 돔을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평평한 천장에 비정형 기법을 사용해서 높이를 착각하도록 그려 넣어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아날로그 가상세계 구현 기법을 선보였다. 위의 두 그림에서 작가가 의도한 ‘어떻게 보이려고 한다’라는 기본 세계관이 회화 기법에 가상세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 3은 사무엘 반 훅스트라텐(Samuel Van Hoogstraten)이 제작한 숨겨 보기 상자다[21]. 이 또한 그림 겹쳐 놓기라는 기법으로 착시와 현존재-가상 존재와의 현실적 거리를 좁혀 가상세계성을 구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의 산수화는 부감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 역시 가상세계 구현을 위한 방법이다. 그림 4, 그림 5는 모두 현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한 이미지 시각화다. 『몽유도원도』, 『촉잔도권』 등의 관념 산수화는 실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가와 감상자가 이를 진짜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상세계 중에서도 가상현실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보이려고 한다’라는 화가의 기본 세계관이 회화 기법에 가상세계성을 부여했다. 오늘날에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바대로 산수화에 대입해보면 관념 산수화는 가상현실에 가깝고, 진경산수화는 증강현실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실경산수화는 디지털 트윈이라고 볼 수 있다.
강세황의 『태종대』는 진경산수화다. 여기서 진경(眞景)은 말 그대로 실제의 경치를 뜻하기도 하지만 실제 경치뿐만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향인 선경(仙景)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대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화가의 사고에 맞게 재구성한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진경산수화는 대상을 사실에 기반하되 사실보다 더 돋보이게 만드는 증강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7은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를 그린 것인데 정밀하게 묘사한 바가 마치 사진 같다. 이러한 실경산수화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모사해 종이라는 플랫폼 위에 옮겨 놓는다는 점에서 가상세계 중에서 디지털 트윈의 성격을 갖는다.
3-2 조형 예술의 가상세계성
회화 기법 외에 또 다른 비(非) 디지털 가상세계 구현의 아날로그 인공 기법의 예로 전통적인 동양의 조형 예술 기법을 들 수 있다. 일본 중세에 만들어진 선(仙) 정원은 아래 그림 8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모두 흰 모래가 있는데, 이는 바다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돌은 산을 표현하고 이끼는 섬을 가상화한다[22].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가상세계성의 아날로그 구현이다. 실제 현실에는 바닷물과 산, 섬,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는 정원이지만 이를 가상으로 전환한 세계의 모습이다. 이것이 니체와 헤겔이 말했던 이념적 가상이다.
가상세계의 아날로그 구현 양상을 가산(假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상세계성을 구현하려고 하는 심리와 의지가 사회적으로 나타나 이를 바탕으로 와유 문화가 대중적으로 퍼져나갈 무렵 조선의 사대부들은 가상세계성을 구현하는 아날로그적 플랫폼으로 가산을 쌓아 올렸다. 이러한 가상세계화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던 현상으로 앞에서 소개한 일본의 선(仙) 정원이 가산과 유사한 형태의 한 예이다. 가산은 말 그대로 가짜 산을 뜻하는데 그림보다 더 생동감이 있다. 조형은 그림과 글을 넘어 훨씬 더 입체적인 가상세계 체험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적 이념 세계가 만들어져있던 조선에서 가산은 단순히 자연물의 모방 미니어처가 아니라 상상의 공간을 가상화해서 현실 세계를 증강하는 가상세계의 아날로그 구현 양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산은 조선의 사대부가 희구했던 인공-자연, 진짜-가짜, 허(虛)-실(實), 유-무의 경계가 사라진 이상향으로 현실과 가상의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진 과정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가상세계의 구현이었다.
조선 가산의 대표적인 예로 함양 하환정의 무기연당(舞沂蓮塘)을 들 수 있다. 직사각형의 연당은 길이 20미터, 폭 12.5미터다. 연못 가운데 기암괴석으로 원형의 당주를 만들어 봉래산을 상징하는 양심대(養心臺)를 만들었다. 이는 천원지방을 상징화한 음양화합형의 원리를 따라 조성한 것으로 천지가 화합해 있으니 곧 축소된 우주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가산의 돌에 봉황석(鳳凰石)과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귀를 새겨 도교적 이상세계를 구축하고 있다[23].
이를 가상세계의 철학적 요소인 시뮬라크르(simulacre)로 따져 보면 가산 제작에서의 가상세계성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시뮬라크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앞 장에서 말한 소여(Gegebenheit)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실체보다 이미지에 더 반응한다. 이것이 이미지가 실체를 넘어서는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의 양상이다. 무기연당의 봉래산은 태생이 가상의 이미지다. 관념 속의 산이기 때문에 봉래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태생이 가상인 것에 현실적 산의 형태를 입히고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이 무기연당 속 봉래산 양심대다. 사람들은 이 양심대를 보고 저마다 관념을 가상적으로 실체화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실체보다 더 이미지화된 결과물이 실체를 대신하게 되는 가상세계인 하이퍼 리얼리티가 나타났음이다. 이를 디지털로 제작했다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에서 모두의 관념이 통일된 모습이 디지털 이미지로 나타났었겠지만 아날로그 기법으로는 이렇게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가산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기연당을 만든 조형 제작자는 가산의 돌에 봉황석과 백세청풍이라는 글자를 새기면서 증강현실을 꾀했다. 한갓 돌에 지나지 않는 물체가 전각이라는 아날로그 기법에 따라 증강되어 이념적 가상세계성을 갖게 된 것이었다.
3-3 서예의 가상세계성
한자는 그 존재의 연원이 가상세계에 있다. 상형 문자로서 한자는 현실 세계의 모습을 추상화하여 글자로 압축한 가상세계성의 결과다[24]. 이러한 가상세계성을 갖는 한자를 활용하는 예술인 서예에서 추사 김정희는 코끼리 상(象)자의 원래 모양을 보여주었다. 추사는 한자의 상형성이 만들어 낸 글자라는 가상세계의 상형성을 풀어내어 이미 가상화된 글자를 역(逆) 가상화해 3D 효과를 꾀했다. 지금의 가상세계 구현 기법으로 보면 추사는 지금의 3D 모델링 도구인 붓이라는 툴로 종이라는 플랫폼 위에 가상세계를 만든 것이다.
한자로 글을 모델링하는 사이 실사 코끼리의 모양새를 종이라는 플랫폼에 집어넣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현실과 글자가 존재하는 가상세계가 중첩 혹은 와해되는 긴장감을 제공한다. 이는 종이라는 플랫폼의 물질성과 코끼리라는 동적 이미지의 가상세계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에서 오는 느낌이다. 디지털을 이용하면 이 긴장 관계가 더 커지겠지만 아날로그로 구현한 결과에서도 느껴진다.
3-4 가상 여행
산수화는 와유 문화의 하나였는데, 조선의 사례를 들자면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산수의 관념성보다는 실재성을 강조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기행사경도는 글이 표현하지 못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화면(畵面)에 담아냄으로써 와유 체험 도구로써 수요가 증가하였다[25]. 유람을 기록하는 사경(寫景)의 방식이 글과 그림으로 함께 나타나게 되면서 산수를 감상하고 즐기는 방식에 이미지의 활용이 더욱 증가하였다. 이는 텍스트 데이터가 시각화되어 가상현실을 구현한다는 로직(logic)으로써 컴퓨터 인공지능 기술만 배제되었을 뿐 지금의 가상세계 플랫폼 제작 논리와 일치한다. 즉, 보는 이가 오프라인 활동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실감 나게 현장감을 느끼게 하려는 기행사경도 작가의 의도와 지금의 디지털 가상세계 기술자가 구현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림 11 『와유첩』은 1816년 김계온이 금강산 일대 유람을 다녀온 후 김홍도의 『금강산군첩』을 모방한 그림에 직접 지은 161수의 시문(詩文)인 『오헌와유록』을 첨부한 것이다. 여기에는 9권에 75폭의 그림이 들어있다. 여기에는 그림 12 철원의 북관정부터 그림 13의 금강산 만물초에 이르는 지역을 그린 그림이 실렸고, 이 지역에 대한 김계온의설명과 관련 시문이 함께 이어진다.
그림 14와 그림 11을 비교할 때 『와유첩』에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아날로그 가상세계 구현과 디지털 가상세계 구현의 양상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4 더 완더 앱(The Wander app)은 현재 시판 중인 디지털 여행 앱으로 인터페이스 올라와 있는 지역의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지역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사진이 함께 나타난다. 이는 실경산수화를 모아 놓은 조선의 『와유첩』이 오늘날 온라인 디지털 여행 앱의 구성과 제작 의도에서 같은 로직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이 나의 삶 영역에 들어와 있는 가상세계성이 『와유첩』과 더 완더 앱 모두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당장 갈 수 없는 멀리 있는 공간을 ‘나’의 영역으로 불러 놓은 산수화는 오래전 인류가 실행에 옮긴 가상세계 구현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디지털 기술이 구현해 내는 바를 조선 시대의 작가들은 아날로그로 그려냈을 뿐이다. 대상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인류의 생각이 오늘날의 디지털 가상세계로 이어졌다.
게다가 『와유첩』에는 『와유첩』을 빌려봤던 당대 문인들의 시문도 함께 더해졌다. 이 시문은 현대 온라인 댓글의 조선판 아날로그 버전이다. 인터넷이 빠졌을 뿐 현대의 가상세계에 해당하는 요소는 이미 조선 시대에도 모두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와유첩』은 조선판 언택트(untact) 온라인 투어로 지금의 디지털 앱과 차이점이 있다면 가상세계성이 아날로그로 구현된 가상 여행이라는 것이다.
Ⅳ. 결 론
본 논문은 가상세계 구현에 있어 디지털 기술 교육에 경도된 지금의 메타버스 플랫폼교육의 한계점을 인문학적 콘텐츠로 보완하여 균형 잡힌 가상세계 교육을 달성하기 위해 역사 속에 자리한 아날로그적 가상세계성의 구현 양상에서 가상세계의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보고자 했다. 예술 기법을 가상세계의 실현성을 일으키는 시각적 이미지 제작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가상세계성을 발생시키는 기제로서의 회화 기법이 이해되는데, 본 연구에서는 아나모픽 원근법과 정원 조경 기법을 예로 들어 비(非) 디지털 방식의 가상세계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이는 예술 철학의 이념적 가상세계성과 크게 관련이 있었다. 동양의 예술 철학인 와유론으로 이를 바라보고자 조선에서 구현된 와유 문화를 살펴본 결과 와유가 당대 사대부의 관념적 상상과 열망을 가상·증강 현실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선인들이 현실에서의 실재와 가상에서의 실재를 합일시켜 산수화, 산수기행기, 가산을 와유했다는 것은 자신의 이상향을 묘사한 결과를 감상하며 그 속에서 정신적 소요를 즐길 뿐만 아니라 현실 존재의 무한한 확장과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으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했던 가상세계의 존재론적 철학을 실천한 모습이라고 읽을 수 있다. 와유를 지향했던 예술 기법은 몸은 현실 세계에 있지만 확장된 또 다른 공간이 현재와 포개져 또 다른 시·공간 속에 또 다른 가상의 삶의 가능성을 열어 오프라인 활동에 실제 참여하지 않더라도 실감 나게 현장을 느끼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바로 이는 현대의 디지털 가상세계 기술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한다. 상상을 현실적으로 가상화해서 현실 세계를 증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와유는 아날로그 가상세계 구현 기법으로 현대 철학에서 가상을 설명하는 시뮬라크르, 소여, 하이퍼 리얼리티 등의 사유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 출현 이전의 이념의 가상화를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지금의 디지털 가상세계 구현 기술은 모두 이러한 과거의 아날로그 가상세계 구현 양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아날로그 가상세계를 예술과 철학의 관점에서 천착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상세계의 철학을 가르치는 실제 강의를 개발하여 학습자들과의 피드백 속에서 가상세계성의 디지털 구현 양상에서 나타나는 특징까지 살펴보아야 할 후속 과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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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2003년:함부르크대학교 교육학과
2021년: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교육학 박사-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2021년~현 재: 동국대학교 사학과
2023년~현 재: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교육학과
※관심분야:디지털, 데이터, 미디어, VFX, 3D Modeling,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