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Digital Contents Society
[ Article ]
Journal of Digital Contents Society - Vol. 26, No. 7, pp.1775-1784
ISSN: 1598-2009 (Print) 2287-738X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Jul 2025
Received 20 Jun 2025 Revised 09 Jul 2025 Accepted 15 Jul 2025
DOI: https://doi.org/10.9728/dcs.2025.26.7.1775

플리커 영화: 빛의 현상학에 대한 탐구

변재규*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강사
Flicker Film: Investigation into Phenomenology of Light
Jae-Kyu Byun*
Lecturer, Department of Fine Arts, Pusan National University, Busan 46241, Korea

Correspondence to: *Jae-Kyu Byun E-mail: usagis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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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연구는 1960~70년대 실험영화 가운데 플리커 영화의 구조와 지각적 조건을 규명한다. 간헐적 운동이 극대화한 명멸은 관객의 망막과 신체를 지각적 인터페이스로 호출한다. 플리커 영화의 작가들은 빛과 어둠의 이항성과 그 시공간적 편재를 드러내며, 사진적 인덱스보다 망막적 인덱스를 우선시한다. 빛의 깜빡임은 시간적 점묘주의로 조직되며, 이러한 명멸 구조는 0과 1의 디지털 논리를 선취한 프리 디지털 알고리즘으로 해석된다. 이는 고정 불가능한 지각의 모호성을 드러내며, 의미 생성의 주체를 관객의 신체로 이양한다. 결과적으로 플리커 영화는 포스트 매체 상황에서 예술 조건을 재사유하게 하는 매체 특정적 실천으로서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s the structural features and perceptual conditions of Flicker films within the context of experimental films fabricated in the 1960s–70s. The intensified intermittency of film projection activates flickering, which prompts the viewer’s retina and body to function as perceptual interfaces. Flicker filmmakers expose the binary opposition and spatiotemporal distribution of light and darkness, thereby prioritizing retinal over photographic indexicality. Light flickering is organized into a form of temporal Pointillism, and this structure can be interpreted as a pre-digital algorithm that anticipates the binary logic of 0 and 1. It reveals the indeterminacy and instability of perception, as well as shifts the locus of meaning production onto the viewer’s embodied response. Consequently, Flicker film emerges as a medium-specific practice that critically inherits formal reductionism and possesses contemporary significance as a theoretical model for rethinking artistic conditions in the post-medium context.

Keywords:

Flicker Film, Structural Film, Perception, Automatism, Binarity

키워드:

플리커 영화, 구조 영화, 지각, 오토마티즘, 이항성

Ⅰ. 서 론

1960년대 회화와 조각등의 예술전반에 파급된 모더니즘의 영향은 영화에도 반영되었다. 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그의 대표적 논고인 『Modernist Painting』에서 제시한 환원주의적 제안에서 비롯되어[1],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의 형식주의 예술개념로 이어지며, 동시대 미니멀 아트와 맥락을 공유한다. 미니멀 아트는 환영보다 재료의 고유한 특성에 관심을 두기 위해 절제된 형태와 재료로 지각의 조건을 탐구하고 관객이 이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환영보다는 ‘사물’, 형태보다는 ‘공간’, 조형성보다 ‘관객의 인지’가 중요하였다. 결국, 사물-그 자체에 천착한 동시대의 예술에 공유된 시점은, 영화에게 지각의 의미를 환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90~2000년대는 디지털 매체의 부상과 함께 필름의 종말과 영화의 종말이라는 담론이 확산된 시기였다. 필름 기반의 실험영화는 현저히 감소하였지만, 매체적·지각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크라우스(Rosalind Krauss)로 대표되는 포스트 매체(Post–Medium)론은 구조영화(Structural Film)의 매체적 사유를 실마리로 삼아 오늘날의 다양해진 예술의 조건들을 설명하려 했다[2]. 특히 크라우스는 『A Voyage on the North Sea』에서 제시한 바에 따르면, 모더니즘이 더 이상 단일 매체의 내재적 특성으로 정의되지 않으며, 매체는 상호복합적 관습과 조건들에 의해 지지된다고 주장하였다​[3]. 즉, 빛, 영사기, 필름 스트립, 스크린, 관객등 다양한 층위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복합체라고 보며, 구조영화는 이러한 복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된다. 이때 구조영화 가운데에서도 플리커 영화(Flicker Film)와 같이 프레임의 점멸 자체를 전면화한 하위 계열은 이러한 복합성을 가장 급진적으로 가시화한 사례로 평가된다. 단일 화면을 지향하는 영화적 현전성은 일견 모더니즘의 단일한 고유성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복수의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4]가 서로 맞물리며, 통일된 경험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이미 내부에 복잡한 구조의 겹침을 전제한다. 이러한 관점은 플리커 영화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의 매체예술에 대한 사유방식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명멸의 반복을 통해 비결정적이고 개별적인 체험을 유도함으로써, 작가 의도를 넘어서는 예술적 체험의 기회를 확장하며 매체는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분해와 재발명이 가능한 복합성의 조건임을 입증한다.

본 연구는 플리커 영화의 빛의 명멸을 일종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상학은 철학적 일반론이 아니다. 이는 영화, 기술적 매개체를 통해 구성되는 지각의 조건과 경험에 주목하는 매체적 접근에 가깝다. 이 관점에서 기술·매체적 요소들은 단순한 외재적 장치가 아니라 지각의 구성 조건 그 자체로 간주 된다. 따라서 철학적 현상학보다, 크라우스의 기술적 지지체가 의미하는 유·무형의 역사적 관습과 기술적 장치들의 겹침을 통해 구성되는 지각의 장이라는 측면에 주목한다. 이러한 접근은 플리커 영화의 물질적 지각적 구조를 분석하는 이론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플리커 영화의 제작이 왕성했던 60, 70년대의 대표작(표 1)을 중심으로 단일 스크린을 뒷받침하던 복수의 매체적 관습들을 구체화한다. 먼저 물질성과 기술적 원리를 주목하여, 명멸효과를 구성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이어 플리커의 영화의 밝음과 어둠, 이미지와 비이미지, 정지와 운동이라는 이항성이 관객의 망막에 어떻게 편재적 리얼리즘을 형성하는지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플리커 영화의 시간 구조를 인상주의의 점묘주의가 제시한 동시적 시각과 비교 분석한다. 두 매체의 시각적 혼합의 비교를 통해, 사진적 인덱스가 제거된 비재현적 지각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플리커 영화에서 빛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에 그치지 않고, 기계적 자동생성과 지각적 반응사이의 유기적으로 발생함을 밝히고자 한다.

Flicker films list (1960s - 1970s)


Ⅱ. 플리커 영화(Filcker Film)

그린버그는 회화의 본질을 평면성(Flatness)을 통해 드러나는 매체 고유성의 자각에 있다고 보았다[1]. 이러한 관점은 당시의 8mm, 16mm의 소형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들 작품은 상업영화의 장식성, 내러티브, 감정 표현을 배제하고, 프레임 단위의 물리적 편집을 통해 필름 매체의 물질적 조건을 전면에 드러내었다. 즉 회화에서 평면성으로 매체의 본질을 추구하듯, 이들 소형영화에서는 빛의 명멸을 통해 매체의 고유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흔히 플리커 영화라 하면 명멸함, 깜빡임으로 스크린 상에 흑과 백 또는 컬러의 빛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빛이 셔터에 의해 차단되어 어두워지고, 다시 셔터가 열리면서 필름을 투과한 빛이 스크린을 밝히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또한 영사기의 광원의 종류(할로겐, 제논)에 따라 색조가 달라지기도 하며, 셔터의 개폐와 별개로 필름 스트립의 편집방법에 따라 흑백의 톤, 컬러 톤이 개별 프레임의 인상을 구분하기도 한다. 인간의 시각은 명멸이 일정 주파수 이상일 때 연속된 밝음으로 인식하지만, 그 이하에서는 밝음과 어둠의 반복으로 인지한다. 이 경계값을 임계 플리커 주파수(Flicker Fusion Threshold)라고 하며, 플리커 영화 작가들은 이 임계 주파수의 아래에서 플리커 현상(Flicker Effect)이 일어나도록 깜빡임을 노출하고 상업영화가 은폐해야만 했던 플리커 현상을 드러냈다. 이 순간 영화적 환영은 해체되고, 금기시되었던 플리커 현상은 관객에게 불편한 자극으로 인식된다. 플리커 영화 작가들은 이러한 금기사항을 의도적으로 발생시켜 재현 작용을 차단하고, 영화 매체의 자기검증적 태도를 실천했다.

플리커 영화는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 운동의 실천안에서 등장하였다. 1960년대 초반 실험영화 비평에서 P. 아담스 시트니(P. Adams Sitney) 와 아네트 미켈슨(Annette Michelson)은 당시의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Undrground Film)들의 흐름을 분석하며, 이를 구조영화(Structural Film)로 범주화하면서[2], 영화의 구조화 과정과 다층적인 층위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언급한 플리커 효과와 같은 특징을 구조영화의 하위의 카테고리로 묶어 작동 원리나 감각적 효과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진행되지 않았다. 반면 동시대의 플리커 영화의 주요작가인 피터 쿠벨카 (Peter Kubelka), 토니 콘라드(Tony Conrad), 폴 샤리츠(Paul Sharits) 는 플리커를 단순한 형식적 장치가 아닌, 지각의 한계를 실험하는 도구이자 언어로 간주했다.

쿠벨카는 <The Metric Films>(1957)과 대표작 <Arnulf Rainer>(1960)(그림 1)등을 통해 흑백 프레임의 단위 배열을 구성하여 영화의 수적(Numeral) 인지와 계측적(Metrical)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영화의 본질을 지각된 움직임(Movement)이 아닌 조직된 빛의 시간적 리듬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플리커 영화에서 빛은 단지 환영의 재료가 아니라, 구조화된 시간 단위로 분절되고 배열되는 매체적 리듬의 단위로 파악하도록 만든다. 프레임의 명멸, 셔터의 주기, 흑백/컬러 필름 배열은 모두 빛을 계측 가능한 시간의 구조로 환원하는 기술적 전략이며, 이는 폴 샤리츠의 스코어 기반 설계나 모눈종이 그리드와 같은 기획 방식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플리커 영화는 빛을 단위화하여 감각을 조직하는 구조적 시간 실험으로서 기술·지각·시간의 교차 지점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사건을 개념화한다.

Fig. 1.

<Arnulf Rainer> Peter Kubelka

한편, 토니 콘라드는 대표작 <The Flicker>(1966)에서 플리커를 인지심리학적 실험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샤리츠는 감정적 트라우마와 무의식을 위해 플리커를 적극 활용하였다. 특히 이무라 다카히코(Imura Takahiko)는 구조영화의 명멸현상이 돋보이는 토니 콘라드, 피터 쿠벨카, 폴 샤리츠의 영화를 꼽으며, “지각영화(Perceptual film)”로 분석하였다[5]. 그러나 이무라의 ‘지각(Perception)’에 관한 해석은 이론적 명료성이 불충분했고, 지각영화의 범주에는 플리커 영화 이외의 실험영화들도 혼재되는 모호함이 발생했다. 이처럼 플리커 기법이 단순한 형식을 넘어 심리적·신경학적 영역까지 확장됨에 따라 시트니식의 형식적 비평과 이무라의 ‘지각영화’만으로는 플리커 영화의 경향들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들의 영화는 구조영화라는 장르의 내부에서 독자적 미학과 이론적 균열의 징후를 드러내며, 구조영화 내의 한 요소로 분류되기보다, 독자적인 탐구방식의 한 갈래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플리커 영화는 구조영화의 물질적 조건을 전면화했던 환원주의적 반성을 넘어, 관객의 체험에 영화의 의미를 부여하여, 지각 자체를 영화의 본질로 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급진적 시도는 영화 내부의 형식적 요소뿐 아니라, 비예술적 요소로 간주되었던 관객의 지각까지 예술 표현의 목표로 함으로서, 전통적 매체의 경계를 확장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장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대표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Ⅲ. 플리커 영화의 전략

3-1 광학적 깊이

플리커 영화는 쿠벨카의 <Schwechater>(1958), <Arnulf Rainer>(1960)를 기점으로 빛의 명멸으로 구성된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향은 토니 콘라드와 폴 샤리츠에 이르러 한층 더 급진화 되었다. 토니 콘라드는 <The Flicker>(1966)의 도입부에 플리커를 통한 시청각 자극이 관객의 신체적 반응(간질, 최면 등)을 유발할 수 있음을 경고문을 통해 명시했다. 실제로 관객중 일부는 두통, 구토등 강한 신체반응을 경험했다. 폴 샤리츠는 <N:O:T:H:I:N:G>(1968), <Epileptic Seizure Comparison>(1976)를 통해 플리커를 외상적으로 보이는 신경학적 기제를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필름에 적층시켜 프로젝터의 명멸과 동기화하였다. 하지만 플리커 영화에서 빛의 명멸만이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없는 프레임에서 빛의 과도한 섬광이 인식되기 때문에 플리커를 광학적 현상만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필름 영화에서 빛은 셀룰로이드 필름과 그 위에 코팅된 유제층을 투과하여 스크린에 투사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필름을 통과한 빛은 크든 작든 필름 표면의 흔적을 반영하여 스크린에 비추기도 한다. 또한 프레임에 이미지가 현상되었을 경우, 일부 작가들에게 빛의 명멸효과보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반복적 교차에서 발생하는 광학적 긴장과 대립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니 기어(Ernie Gehr)의 <Serene Velocity>(1970)는 사진재현적 이미지를 호출하며 영화의 의미를 움직임에서 정지로, 그리고 정지와 정지의 합성적 충돌을 제시한다. 이때 관객의 영화적 경험은 더 이상 움직임의 환영이 아니라 진동하는 광학적 깊이(Optical depth)에 있다. 이러한 플리커의 방식은 사진의 재현방식을 빌려오지만, 영화의 지향은 필름이라는 물질적 지지체 위의 인덱스(Index)적 흔적보다 망막이라는 생물학적 층에서 발생하는 시각의 지속(Persistence of Vis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어의 영화가 공간적 측면에서의 광학적 인지로 시도되었다면, 반면에 켄 제이콥스(Ken Jacobs)의 작업은 영화를 물리적으로 다룸으로써 시간 자체를 분절하고 재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3-2 영화의 해체

켄 제이콥스의 <Tom Tom the Piper’s Son>(1969)은 영화시간의 인위적 확대를 통해 드러나는 필름의 표면과 정지 이미지를 보여주고, 이와 결부된 임계 플리커 주파수를 급격히 노출시켜 인식불가한 영화로 만들어 영화구조를 해체한다. 이와 같은 플리커 영화의 급진적 환원주의는 근본적으로 매체 고유성의 강조라는 모더니즘적 문제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그러나 플리커 영화의 목적은 매체 고유성의 확인이나 환영의 해체에 머물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요 플리커 영화들은 관객의 의식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지각을 발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략으로 기획되었다. 재현을 파기하기 위하여, 필름을 훼손하거나 필름을 녹이는 파괴적 제스쳐를 통해 외부와 내부의 의미 연결을 차단한다. 이는 재현을 부정하기 위해 필름만을 고통스럽게 다루는 것만은 아니었으며, 빛을 통제했던 카메라마저도 버리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빛을 통해 대상과 매개되었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카메라가 없으므로 대상이 제거되어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작가이자 실험영화 이론가인 피터 지달(Peter Gidal)은 이러한 특징을 “공허에 가까운 기표(Signifiers approaching Emtiness)”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구조영화가 성취하려던 반재현적 미학을 설명하기도 했다[6].

볼 것이 없는 공허함, 대상을 상실한 텅 빈 화면은 오히려 내부의 지각 작용을 일깨운다. 이러한 공허는 대상의 부재보다 본다는 행위, 즉 그 자체의 순수한 현전이 대상의 결핍을 메운다. 본다는 행위는 영화의 시간을 인지한다는 측면에서 쿠벨카의 계측적 영화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플리커 영화의 깜빡임의 시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외부자극을 넘어 관객의 내면 깊숙한 고요한 의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1960년대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일부 작업, 특히 백남준(Nam June Paik)의 <Zen for Film>도 이러한 영화적 수단의 수행적/ 명상적 이해로 가능하다. 이처럼 구조영화가 목표했던 반재현적 전략과 자기성찰을 위한 환원적 수단의 의미만으로 플리커 영화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구조영화의 형식적 평가는 플리커를 영화의 하위로 두고, 영화 내부적 물질성의 논리를 검증하고자 했지만, 플리커 영화는 내부에 머물지 않고, 영화 외부로의 지향, 즉 지각, 신경학, 명상과 같은 비예술적 영역들과 연결되었다. 진 영블러드(Gene Youngblood)가 “확장된 영화(Expanded Cinema)”라는 용어로 그 특징을 설명했듯이[7], 플리커 영화는 영화 내부만이 아닌 외부에 동시에 기거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플리커 영화는 단순한 빛과 어둠의 반복을 넘어 지각의 모호함을 실험하는 인지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빛과 어둠이라는 두 요소를 극단적으로 교차시켜 관객의 지각을 교란함으로써, 재현이 제거된 영화는 표현자나 수용자 양측에게 심리적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작가들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밝음과 어둠의 대립 구조가 각 작품 안에서 어떻게 조직되고, 그로 인해 관객의 지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Ⅳ. 이항성: 서로 다른 것들의 용해

4-1 연속성의 단절

플리커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에서 기대되는 움직임을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프레임의 명명을 통해 개별 프레임의 단절을 제시하며, 기존의 영화 구조를 해체한다. 이러한 영화적 실험은 이미지의 재현을 넘어서는 지각적 단계에서 실천되었으며, 그 결과 관객은 명확한 서사의 전개나 시각적 연속성 없이 스크린과 대면하게 된다. 상영 내내 지속되는 명멸 현상은 사실 필름을 매체로 하는 영화라면,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아야 할 금기사항에 가깝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에 가장 원초적으로 탑재된 기술적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의 명멸의 이항성은 가장 근원적 형태이며, 세상의 모든 필름 영화의 기술적·지각적 전제조건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전통적인 영화를 지탱하는 재현과 연속성의 원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점에서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이 정리한, 연속적 움직임의 인덱스적 재현을 경유한 영화의 오토마티즘(Automatism)은 플리커 영화와 명확히 대비된다[8]. 바쟁의 사진적 존재론에 근거한 영화의 자동성은 사진이라는 매체 특유의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의 자동성이란, 사진 이미지가 세상에 대한 수작업이 아닌, 기계(카메라)에 의해 객관적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바쟁은 사진을 세계의 물리적 흔적으로 간주하고, 그 기계적 재현 방식에서 예술적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진실의 인식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카벨의 영화론으로 계승되어, 영화란 의심할 여지 없는 세계의 자동복제라는 철학적 전제를 갖게 되었다. 이때 ‘자동복제’란 단지 정지된 이미지의 복사가 아니라, 기계적 메커니즘(카메라, 셔터, 필름 퍼포레이션)의 연속적 작동을 통해 세계의 움직임까지 자동적으로 포착하고 제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연속성은 초당 24프레임이라는 일정한 간격으로 촬영된 이미지를 영사기와 셔터를 통해 재현할 때, 인간의 지각 체계와 결합하여 시각적으로 ‘연속된 세계’라는 환상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리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동복제와 인덱스에 대한 믿음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이들 작품은 연속된 움직임을 제시하기보다, 프레임 간의 단절, 깜빡이는 리듬, 빛과 암흑의 교차 등으로 구성되어 운동의 환상 자체를 파괴한다. 즉, 영화적 운동이란 실은 기계적 간극과 지각의 보완에 의해 생성된 인공적 구성물임을 드러내며, 플리커 영화는 그 환상을 유지하던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플리커 영화는 카벨이 설정한 영화의 존재론 즉, 세계의 신뢰 가능한 자동재현 장치로서의 영화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연속성은 허상이며, 영화는 자동적 재현이 아니라 의식과 기술의 교차점에서 구성되는 물질적·지각적 장치임이 드러난다. 이로 인해 오토마티즘은 더 이상 ‘세계를 모방하는 기계’를 수행하지 못하고, ‘지각을 교란하는 장치’로 재설정된다. 실제로 쿠벨카, 콘라드, 샤리츠의 주요 작품에서는 사진적 인덱스가 거의 없거나, 연속된 사진 이미지들의 동역학적 환영이 플리커의 명멸과 간헐적 리듬, 관객의 지각 개입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영화 매체의 오토마티즘이 지각 실험으로 전환된 계기이면서 인덱스적 연속성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명멸의 이항성을 제시한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절에서는 플리커 영화의 이항성이 어떠한 역사적·이론적 함의를 갖는지를 매체 고고학(Media Archaeology)적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4-2 매체 고고학적 계보

플리커는 전통적인 장면 간 몽타주보다 프레임 간 간헐적 단절에 주목한다. 이는 기존 영화 이론, 특히 쿨레쇼프 효과(Kuleshov effect)의 숏과 숏이 충돌하여 생기는 의미와 해석의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쿨레쇼프식 몽타주는 두 개의 상이한 이미지를 접합함으로써 제3의 감정적·서사적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플리커 영화는 프레임과 프레임의 충돌에 주목함으로써, 의미적 몽타주가 아닌 프레임과 프레임이 마주한 불연속적 단면에 의식의 개입을 허용토록 한다. 이는 의미 생성보다는 지각의 떨림과 잔상의 순간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비개념적 체험을 지향하는 것이다. 저명한 실험영화작가이자 애니메이션 작가 노먼 맥라렌(Norman McLaren)의 가장 유명한 통찰 ‘보이지 않는 틈’에 대한 정의는[9] 쿠벨카의 다음과 같은 견해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전략. 그렇다면 영화의 표현구조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에이젠슈타인은 그것이 숏과 숏의 충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숏과 숏의 사이가 아니라,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은 점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10]

앞에서 살펴본, 쿠벨카 견해는 영화의 본질이 움직임에 있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반론을 제기하고, 프레임 간의 간헐적인 충돌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각적 긴장에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흥미롭게도 맥라렌과 쿠벨카, 이 두 사람이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은 프레임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특히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예술적인 어떤 표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인식을 보여준다. 맥라렌은 움직임의 동역학을 다루는 애니메이션학적 관점이지만, 개별 프레임 사이에 발생하는 예술적 표현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쿠벨카의 영화론과 이론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이러한 이항성은 쿨레쇼프를 거슬러 19세기 영화전사를 소환한다. 한때 영화사를 철학적 장난감으로 불려 졌던 광학 장치의 계보 말이다. 타우마트로프(Thaumatrope)는 양면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회전시켜 생성하는 불확정적 이미지의 겹침이다. 새와 새장을 각각 그려 돌리면 새장에 갇힌 새처럼 보인다. 이는 서로 다른 극성의 그림이 회전에 의해 하나로 용해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후의 영화 전사에서는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가 등장하며 일련의 정지 이미지를 연속된 사물의 움직임으로 바꾸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극명한 영화사의 갈림길을 목격한다. 매체로서 타우마트로프는 움직이는 그림보다는 정지 이미지의 교차를 통해 장면적 유사성을 합성하는 방식에 기반한다. 이를 참조하듯, 플리커 영화 역시 움직임보다 양면적 이미지의 교차를 보여주며, 지각의 단속적 체험을 강조한다. 따라서 플리커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사에서 움직임의 환영을 구축해온 페나키스티스코프-시네마토그래프의 맥락과 다르게 타우마트로프적 계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곧, 이 이항적 시각효과는 현대적 실험영화의 기획과 불연속이 아니라, 그 기원이 영화전사와 이어지는 매체 고고학적 연속성을 입증하는 대목인 것이다.

어니 기어의 <Serene Velocity>는 이러한 매체 고고학적 광학장치가 만들어낸 시각효과를 기계적으로 재현해 낸 실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영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어느 대학교의 지하 복도에 고정된 채, 50mm와 55mm의 초점거리를 4프레임마다 교차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며, 이 단순한 촬영방식은 점차 45mm에서 60mm로 진폭을 확장함으로써 스크린 공간의 양자화된 변형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초점 심도의 왕복운동은 1/6초 간격으로 지속되는 4 프레임 단위의 광학적 펄스(Optical pulse)를 형성하고, 망막에 잔류하는 이전 영상과 새로운 영상 사이의 간섭 효과를 통해, 정지된 이미지들의 연속으로부터 동적인 착각을 합성해 내었다. 노엘 캐럴(Noël Carroll)은 이 작품을 분석하면서, 기어의 작업이 단순한 형식적 실험을 넘어서 영화라는 매체의 존재론적 조건, 즉 운동(Movement)과 정지(Stillness)사이의 지각적 긴장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형태를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캐럴에 따르면, 영화는 논리적 명제나 개념적 분석 대신, 시청각적 실험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실현할 수 있으며, <Serene Velocity>는 그 전형적 사례로 제시된다[11].

한편 이 영화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영화기술의 파라메터인 초점거리를 유동하는 지각의 기제로 가져왔다는 점이다. 기어의 수작업(Hand-made)은 매 프레임마다 영화의 자동기계적 촬영 비판적 개입으로서 기능하여 4 프레임 마다 단편적 노광을 통해 24 fps 라는 영화의 연속성의 일루젼을 분해하고 영화시간을 양자화된 상태로 재구성한다. 관객은 정지상의 운동으로부터 공간의 심도의 주기적 떨림을 탐지해 낸다. 이는 타우마트로프의 앞과 뒤의 이미지가 섞여 만들어내는 새장 속의 새와 같이, 영화의 초점거리 변화가 두가지 복도의 깊이를 만들고, 안정되었던 복도의 사진적 표면은 공간적 심도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기어는 극도의 초점조작으로 투사된 평면 위에서 가상적인 공간의 착각을 유도하고, 영화장치의 물질적 파라메터를 지각 각성의 도구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연속된 움직임의 재현이 아니라, 정지 이미지들의 빠른 교차에 의해 생성되는 운동임을 드러낸다.

쿠벨카가 앞서 강조했듯, 영화는 숏과 숏 간의 몽타주 효과보다 더 근원적인 수준에서,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간극을 통해 운동을 생성하는 매체이다. 플리커는 프레임 간의 단절을 통해 지각적 개입을 유도하며 언어화되기 이전의 소여로 관객의 감각에 호소한다. 다시 말해 플리커 영화의 본질은 의미를 전달하거나 서사 이전에, 지각이 작동하는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와 같이 플리커 영화는 이항성이라는 구조 아래, 사진적 재현을 반영하면서도, 지각의 모호성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대다수의 플리커 영화들이 카메라 없이(Cameraless)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의존해 영화의 존재론을 규정했던 방식과 달리, <The Flicker>는 렌즈를 통하지 않고, 일체의 기표작용을 포기한 무표상 상태로 신경학적 결과를 도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직접 두 개의 프레임을 기초적인 모듈구성으로 하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듈을 반복삽입하여 순수한 셔터의 스트로보(Strobo) 효과에 의한 빛의 패턴으로 구성하고 있다. 콘라드는 주로 흑백의 심플한 조합의 방법을 선호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플리커 영화에서는 컬러필터를 통해 필름을 노광하고 현란한 지각경험을 유도하기도 했다.

4-3 만다라 필름

어떤 플리커 영화는 개별 프레임의 밝음과 어둠만이 아니라, 이를 영화의 전체구조에서 역전된 대칭성을 보여주어 영화의 존재론을 수행의 장으로 이끌었다. 본 절에서는 플리커 영화의 역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폴 샤리츠가 1966년부터 68년까지 제작한 만다라 영화(Mandala Film)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다라는 불교와 힌두교에서 만다라는 명상과 수련을 돕기 위한 지침서로 신성한 공간을 설정하는 지도와 같다. 만다라는 윤회와 순환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구조화한 지도이며, 중심과 대칭, 원형 반복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형상화한다. 샤리츠는 이를 종교적으로 다루기보다 대칭을 통한 구조적 반복, 중심과 주변의 변주라는 형식적 가능성을 작품 내에서 수행적 실천으로 구현해 내었다.

<Ray Gun Virus>(1966)는 샤리츠의 수행적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오직 컬러 프레임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필름의 스프로켓 홀이 프로젝터의 사운드 헤드를 통과할 때 발생하는 스타카토(Staccato)성 효과음은, 상영시간 내내 툭툭 끊어지는 소리로 관객의 청각을 자극한다. 시각적으로는 명멸의 이항 구조가 반복되며, 이 구조는 일종의 모듈체계를 구성한다. 전반부에는 정방향 모듈이 투사되고, 후반부에는 전반부의 정방향 모듈 구성과 역방향의 모듈이 대칭으로 배치된다. 이는 곧 티베트 만다라의 원형성과 대칭구조를 필름 스트립에서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실험은 <N:O:T:H:I:N:G>(1968)에서 두드러진다. 샤리츠는 기획의도에서 “이 작품이 주제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 곧 ‘불가능한 것’을 구체적 흐름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영화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12]. 만약 샤리츠의 말한,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 공(Emtiness)의 지혜라면, 샤리츠는 이 만다라 필름을 통해 영화적 화두를 구체적으로 체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Ray Gun Virus>뿐만 아니라 <N:O:T:H:I:N:G>에서도 화면 안에 T자 형태의 구성을 통해 의식의 출입구, 혹은 ‘문의 역할’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대칭성과 역대칭 구조를 형상화했다.

그의 만다라 필름은 물질세계에서 나타나는 시간성의 인과인 벡터가 대칭으로 배치됨으로써 벡터의 방향성은 상쇄된다. 이로 인해, 영화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움직임 없는 운동이라는 지각적 역설을 통해 관객의 의식을 내부로 이끈다. 또한 움직임도, 기표도 사라진 상태로 운동하는 필름의 그림자는 일종의 물리적 한계가 부유 효과를 얻는다.

1971년, 샤리츠는 영화가 아닌 설치작품 <Frozen Film Frame>(1971–76)(그림 2)을 제작하게 된다. 샤리츠는 그의 미술경력 초기에 화가로서 출발하였다[13]. 샤리츠는 단색 화면을 비추어 의도적으로 회화의 미디움으로서의 평면성을 의식했다. 그에게 영화는 시간성의 강박관념이었고, 이는 그를 다시 회화로 돌아가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만다라의 순환성은 필름의 폐쇄적 물리적 구조(시작과 끝이 명확한) 안에서는 그 형상적 의미를 온전히 포개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영화의 즉각적 현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물질적 지지체 위에 남아있는 만다라의 형상은 미완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샤리츠는 영화매체가 지닌 물리적인 제한성을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하는 장치였다. 이는 물질을 통해 감지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덧없음이며, 바로 그것이 샤리츠가 마주한 영화의 본질이었다. 샤리츠는 1967년 벨기에 크노케-르주트(Knokke-Le Zoute)에서 열린 제4회 국제실험영화제에서 자신의 작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Fig. 2.

Paul Sharits, Frozen Film Frame (detail), ca. 1966 - 77, 16-mm color film strips, Plexiglas

“나는 모방과 환상을 버리고, 셀룰로이드의 이차원 스트립, 개별의 장방형 프레임, 스프로켓과 유제의 성질, 영사기의 조작, 3차원 광선, 주변환경의 조명, 2차원의 반영적 스크린 표면, 망막 스크린, 그리고 개별의식의 심신적 주체성이라는 층위의 보다 고차원의 드라마로 진입하고 싶다.”[12]

그는 망막을 수동적 수용체가 아니라 능동적인 스크린(Screen)으로 보았다. 망막은 플리커의 빛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생물학적 지지체이다. 망막은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저장할 수 없지만, 영사된 빛의 자극을 통해 볼 수 없었던 간극을 드러나게 한다. 이렇게 망막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경험은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빛의 순간적 인상과 유사한 감각구조를 갖는다. 특히 고정된 이미지의 윤곽에 불편함을 느꼈던 인상주의 화가 죠르쥬 쇠라는, 다른 방식으로 회화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거리감에 의해 조직되는 고정할 수 없는 빛의 동시성, 즉 망막에 선택적으로 통합되는 빛다발의 일렁임이다. 죠르쥬 쇠라와 폴 시냑(Paul Signac)과 같은 신인상주의자들은 점(Dot)적 구성을 통해 동시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러한 시도는 명멸의 순간성과 밀접한 연관을 보여준다. 샤리츠가 만다라 필름에서 <Frozen Film Frame>으로 이행했던 것은, 바로 영화에서 경험했던 시간성을 회화적 평면위에 고정함으로써 동시성의 경험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적어도 예술사에서는 감각의 고정보다 유보(Suspension)가 더 사실적인 리얼리즘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림이나 필름, 모두에게 빛을 보는 방법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난제로 남는다. 인상주의자들에게 태양은 눈부심을 초래했지만, 플리커의 빛들은 그보다 신체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이었다.


Ⅴ. 순간과 연속의 모호함

5-1 지각의 재구성

앞서 플리커 영화가 재현의 해체, 기존 영화의 연속적 몽타주와는 다른 이항성의 구조에 의해, 프레임 사이의 단절성을 강조하였음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영화가 목표한 지각의 체험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영화적 효과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플리커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시지각의 구조를 조작하고 재구성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각예술 전반이 추구해온 ‘지각의 조건’에 대한 탐구와 맞물려야 한다. 다시 말해 이는 시각예술의 전반의 화두이며, 재현의 의무를 벗어나 표피의 닮음보다 더 근원적인 원인을 빛에서 찾으려 했던 공통된 숙제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광학과 색채학, 신인상주의가 대상의 본질을 질료가 아닌 빛으로 주목한 것처럼, 플리커 영화 역시 ‘어떻게 보는가?’를 빛을 감지하고 조절하는 지각의 해부학적 과정으로 설정하였다. 인상주의자들의 빛의 연구가 자연 속 짧은 순간에 존재하는 사물과 풍경의 표현에 목적을 두었다면, 애초부터 대상이 부재한 플리커 영화의 빛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엄연히 디에게시스적 환영과도 다르며 명확한 개념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플리커 영화는 언어적이거나 개념적 체계가 아니라, 프레임과 프레임과의 단절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영화의 본질로 보았다. 관객들은 서사 전달을 위한 이미지들이 결핍된 스크린을 마주하게 되고, 그 결과 낯설고 소외된 시각 경험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체험은 관객을 수용자가 아닌, 새롭게 의미를 구성해야만 하는 심리적 주체로 전환시키며, 영화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려는 인지적 개입을 요구한다. 이는 전통적 영화 매체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진 영블러드의 비판의식이 반영된 “확장영화”를 다시 상기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5-2 점과 프레임

19세기 색채 연구에 따르면, 사물의 색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대기의 조건과 빛의 반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었다. 신인상주의, 특히 쇠라는 이러한 색채 이론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점묘주의(Pointillism)는 오랫동안 회화의 주제가 되어온 사물이나 대상을 피하고, 점이나 터치의 밀도적 구성을 통해 색과 빛의 상호작용을 회화의 주제로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 질료로서의 색보다도 근본적으로 빛의 효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쇠라의 점묘가 빛을 정의하는 공간적 방식, 즉 규칙적인 색점의 병치는 플리커 영화의 개별 프레임간의 명멸적 이항성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다. 인상주의 화가가 점을 평면 위에 구성했다면, 유물론적 영화작가들은 프레임을 시간조형의 최소 단위로 다루었다. 두 매체 모두 빛을 통해 ‘점’(회화)과 ‘프레임’(영화)이라는 최소 단위를 통해 전체 이미지를 지각 경험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는 현실 세계에서 시선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동시적 구성에 기반하며,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흐름과 간헐적 프레임들의 단위가 일방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지각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쇠라의 점묘화들은 관찰자와의 일정한 거리에 따라 흐릿해 보였다가 점으로 분해되고, 다시 일정 거리를 충족하면 시각적 패턴이 연속되어 하나의 전체 그림이 나타난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거리에 대한 욕망이 잘 나타난다. 이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화 <Blow-Up>(1966)에서의 주인공의 시선과 닮아있다. 주인공이 사진을 확대할수록 시각정보는 모호해지며, 자신이 추적하던 진실의 윤곽이 결국 수수께끼 같은 회화적 추상으로 빠져드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객의 자유로운 시선이 아닌, 영화 내부에서 이야기의 목적에 맞게 의도된 카메라의 시선이다.

점묘주의 회화에서는 자율적인 관찰자와의 거리 조절을 통해 시각적 패턴의 형성이 형성되는 공간적 축을 기반으로 하지만, 플리커 영화는 프레임 간의 시간적 간극이 강제로 주어지는 시간적 축에서 지각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지각의 개입양상과 그 조절 가능성이 회화와 영화에서 본질적 차이를 갖는다.

영화의 시간을 확대하면, 움직임은 동결화의 조짐을 보이며, 마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의 연속사진처럼 운동은 화석화된다. 반대로 축소하면 운동의 질감은 복원된다. 만약 <the Flicker>의 필름을 영사기에서 가져와, 필름 스트립를 펼쳐보면, 그것은 단지 흑과 백의 수직적 구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행위는 물리적 렌즈에 의존하지 않고, 지각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은유적 확대경을 요청한다. 회화에서의 확대는 점들이 개별적 요소로 분산되는 공간적 지각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영화에서 확대는 정지 프레임 간 간극이 드러나면서 운동의 환영이 해체되는 시간적 지각의 해체를 불러온다. 즉, 회화의 확대는 공간적 질감의 분산이고, 영화의 확대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붕괴되는 경험을 동반한다. 따라서 두 매체는 확대경이라는 동일한 감각적 조건 아래에서, 공간과 시간적 해체라는 매체고유의 방식으로 지각의 해체를 유도한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의미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과의 모순이 아니라, 보는 행위 자체에 내재한 조건이다.”라고 지적했다[14]. 이 현상학적 통찰을 플리커 영화에 적용하면, 단절된 프레임의 틈새를 메꾸고 있었던 것은 몸과 감각의 능동적 참여를 통해 구성되는 관객 자신의 지각이다. 플리커 영화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곳을, 즉 개별 프레임 사이의 지연과 유예를 통해 시각의 구조를 드러내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재현의 위기라기보다 지각의 가능성에 대한 주시이며, 물질-비물질, 물리학적 빛과 현상학적 빛 사이의 전환을 통해, 고정된 환영보다 진동하는 지각의 심연 안으로 영화를 확장한다. 이러한 상호 연관성, 곧 정지와 운동이 공존할 수 없기에, 어느 한쪽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의 역학관계는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결코 동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퐁티는 비록 플리커 영화를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통찰은 영화(Film)의 속성을 이해하고, 플리커 영화가 드러내려는 지각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만약 이러한 통찰이 매체적 실천으로 구체화 될 수 있다면. 켄 제이콥스의 <Tom Tom the Piper’s Son>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영화 속 보이지 않는 시간의 틈과 지연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탐사한다. 여기서 화면 내의 이미지는 구석구석 확대되거나, 이미지의 미세한 움직임과 정지가 느리게 천천히 드러나면서 시간 자체가 시각적으로 구성된다. 제이콥스는 영사기를 역재생하거나 간헐운동을 멈춘 뒤, 필름을 손으로 천천히 당기거나 되감는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통상적인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내던 개별 정지 프레임 사이의 간극을 하나하나 목격하게 된다. 이는 영화가 스크린 뒤로 감추어 온 영화의 물리적 기반과 시지각의 작동조건을 표면에 부상시키는 행위이며, 시간의 거리감에 의해 유지되던 지각의 균형을 위반하려는 미학적 충동을 의미한다.

폴 샤리츠의 작업들은 시간과 지각에 대한 관심을 분석적이고 형식주의적으로 확장한 작품들이었다. 이미 그의 아이디어는 시간구조를 수적 단위로 분절하는 제작의 준비단계에서 일종의 회화적 형식의 스코어(Score)를 작성하였다(그림 3). 옌 보뷔(Yenn Beavouis)따르면 샤리츠는 작품의 기획단계에서 모눈종이에 시각적 스코어를 그려 넣는 방법으로 시간의 경험을 분석하였다[13]. 샤리츠에게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이 아닌, 계측이 가능한 시간 단위로 구성된 수적 구조였다. 그는 드로윙과 페인팅을 훈련받은 만큼, 영화와 회화가 연결 가능성을 고민하였고, 영화제작이 완료된 시점에서 회화, 콜라쥬 등을 발표하였다. <Frozen Film Frame>은 만다라 필름의 설명을 보충하듯, 스크린 이미지가 되기 전의 필름 스트립 형태의 만다라 영화를 종교의 수행적 방법론으로 펼쳐놓은 작업이다. 또한 수행적 구조를 고스란히 셀룰로이드 필름의 물질화된 점으로 콜라주나 물감으로 옮겨 놓기도 했다. 이는 절대주의, 추상주의 회화와도 다른 개념적 스코어이며, 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이 수적 단절의 필터를 거치며 분절되고, 시간의 점적 모듈화가 구현되는 설계도라 할 수 있다.

Fig. 3.

Frozen Film Frames Study: Declarative Mode II, felt pen on graph paper, 1976

이러한 방식, 즉 그래프 용지의 그리드(Grid)기반의 구조화는 르네상스 미술사의 고전 형식주의적 맥락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선 원근법이 현실공간을 평면에 가두기 위한 격자 구조였다면, 샤리츠의 그리드는 시간의 연속을 작품 타이틀처럼 동결화를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주의 태도는 지각이 요구하는 개방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영화의 물리적 장치를 바탕으로 한 자동성이 수학적 조화와 기계적 반복에 제약받을 때, 지각의 자율성은 필연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플리커 영화가 지각의 주체를 관객에게 이양한 측면에서, 샤리츠의 형식주의적 설계는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샤리츠의 작품을 이해할 수 계기가 된다.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없음"을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체험하게 하려는 그의 작업은 닫힌 구조와 열린 체험을 오가며, 영화와 회화의 매체로서의 취약성을 내포하며 전개된다. 그가 영화의 현상학적 경험을 공간 안에 물리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의도는 영화는 시각적 완벽함이나 전능한 환상이 아니라, 항상 일종의 취약성, 즉 그 효과를 볼 뿐만 아니라 간파할 수 있는 약점을 지닌 단지 물질적 집성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영화는 인식 불가능한 정지된 이미지들의 빠른 재생으로 구성되지만, 이러한 근본적 메커니즘은 대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퐁티의 통찰에서 유추할 수 있듯, 비가시성은 보는 행위에 내재하는 조건이다. 맥라렌과 쿠벨카가 발견한 프레임 간의 간극은 이러한 비가시적 차원이 표현과 수용, 양측 모두에게 창조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플리커 영화는 재현된 이미지의 연속성 자체보다, 반복적이고 불분명한 깜빡임의 리듬을 통해 지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감각적 기반을 드러낸다.


Ⅵ. 결 론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의 실험들은, 현대미술에서 지배적이었던 공간과 사물에 대한 견고한 물질성을 허물고 개념으로 이행하는 동시대의 흐름과 같이한다. 그러나 이는 개념 중심의 예술적 실천이라기보다는 인식과 감각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시각 심리학적 문제의식이 예술과 관계를 설정하려는 장면에 가깝다. 구조영화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사관의 영향을 받아 사물을 다루었다면, 플리커 영화는 지각을 살피면서도 형식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폴 샤리츠의 만다라 필름처럼, 플리커 영화는 영화의 경험 속에 능동적 지각의 도입과 물질적 전경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독특한 이중성을 드러낸다. 점묘주의가 캔버스, 붓질, 안료, 빛, 망막이라는 복합적 지지체를 통해 지각의 순간적 구성을 유도한 것처럼, 플리커 영화 또한 필름, 프로젝터, 프레임 간 간극, 스크린, 관객의 신체라는 기술적·지각적 지지체의 총합 위에서 지각을 유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매체는 모두 특정한 역사적 기술 조건 위에서 예술 체험의 구성 과정을 전면화했다는 점에서 매체 고유의 지지체와 지각의 연계에 주목하는 실천이었다. 플리커 영화는 구조영화의 내부 분류로 이해되면서도, 셔터에 의해 개폐되는 빛과 어둠의 이분법이라는 영화의 가장 원초적 욕망을 외부화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실험은 그린버그식 환원적 모더니즘과 한편으로는 작품의 의미 생성을 관객의 신체적·지각적 반응에 분산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 태도로도 읽힐 수 있다.

플리커 영화는 사진재현과 자동 기록의 역사를 내포하지만, 동시에 순수한 투과성과 자동 재생 구조를 갖춘, 아직 그 가능성이 닫히지 않은 매체이다. 왜냐하면 플리커 영화는 전통적 영화의 책무와 동떨어진 실천이자, 구조영화의 형식적 실험을 계승하면서도 그로부터 재발명된 영화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단일한 고유성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기술적 지지체들의 중첩과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 플리커 영화는 이러한 유형적·비유형적 매체조건을 자기성찰로 드러내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에서, 토니 콘라드의 플리커는 신경생리학적 자극에 대한 직접적 개입하고자 하였으며, 어니 기어의 타우마트로프적 영화는 19세기 프리 시네마(Pre-Cinema)의 광학장치를 환기하는 재귀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폴 샤리츠는 무의식, 외상의 해체와 연결된 심리적 실험을 통해, 영화 외부에 있던 비예술적 방법론을 영화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예술적 경계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플리커 영화는 심리, 지각, 명상과 같은 비예술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그린버그적 모더니즘으로 읽기 어려운 매체의 존재 방식을 선구적으로 탐구하였다. 비록 플리커 영화가 오늘날의 예술에서 맥락적으로 일정 부분 퇴색되었을지라도, 그 실천은 단순한 영화의 회귀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과 지각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이론적 시도이자 실천이었다. 또한 전유와 포스트 재현 담론에서 강조되는 의미 생성의 개방성, 주체와 객체의 관계 재설정, 그리고 현실 재현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로써 플리커 영화는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없는 이미지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이며, 관객에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인간과 기계의 경계 해체, 그리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포스트휴먼 담론과도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연구의 내용과 범위상, 1960~70년대 서구 아방가르드 실험영화, 특히 플리커 양식의 미학과 이론적 의의를 규명하는데 집중하였다. 그 결과, 비서구권 작가들이나 동시대 디지털 환경에서 플리커 스타일이 어떻게 변용·수용되었는지 포착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향후 연구는 플리커 영화를 비서구권 실험영화 전통이나 기술 융합적 예술 실천 사례를 포함한 비교연구를 통해 플리커 영화의 맥락을 확장하고, 전시 설치·퍼포먼스가 접목된 매체 환경에서 플리커 필름이 실제로 적용되는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편, 예술사적 접근을 넘어, 신경과학 기반의 인공지능모델과 연계하여 감각과 지각의 연구로서 신경학적 영화(Neurological Cinema)와의 접점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기계와 신체 사이의 지각적 상호작용을 조망함으로써 매체와 신체가 분리될 수 없는 조건임을 환기시킨다. 이는 감각경험이 기술적 매개를 통해 구조화되고, 신체와 미디어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각이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더불어 감각경험이 플리커 영화의 구조적 핵심인 빛과 어둠의 이항성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존재론적 기반인 0과 1의 논리와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명멸 구조는 단순한 기술적 유사성을 넘어서, 지각이 연속적 흐름이 아닌 단속적 차이와 간헐적 신호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다는 인식론적 전환을 유도한다. 플리커 영화는 비록 아날로그 기반의 실험이지만, 그 깜빡임의 구조는 정보의 단위화를 전제로 하는 디지털 감각 환경과 논리적으로 접속된다. 이로써 플리커는 프리 디지털(Pre-Digital) 적 알고리즘의 선구적 실천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물리적 프레임의 조합과 반복을 통한 지각의 연산적 구조화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질량 없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플리커 영화의 실험정신은 지각과 기술, 이미지와 의식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디지털 매체에서 작동하는 지각 체계의 역사적 원형이면서, 플리커 영화는 동시대 예술과 지각 이론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시 재조명하는 유효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2S1A5B5A17048313).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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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변재규(Jae-Kyu Byun)

2007년:쿄토 세이카대학교 대학원 (석사)

2011년:쿄토 세이카대학교 대학원 (박사-예술전공)

2020년~현 재: 부산대, 울산대 강사

※관심분야:실험영화(Experimental Film), 매체예술(Media Arts) 등

Fig. 1.

Fig. 1.
<Arnulf Rainer> Peter Kubelka

Fig. 2.

Fig. 2.
Paul Sharits, Frozen Film Frame (detail), ca. 1966 - 77, 16-mm color film strips, Plexiglas

Fig. 3.

Fig. 3.
Frozen Film Frames Study: Declarative Mode II, felt pen on graph paper, 1976

Table 1.

Flicker films list (1960s - 1970s)

Title(Year) Artist
Adebar (1957) Peter Kubelka
Schwechater (1958) Peter Kubelka
Arnulf Rainer (1960) Peter Kubelka
The Flicker (1965) Tony Conrad
Ray Gun Virus (1966) Paul Sharits
PIECE MANDALA/END WAR (1966) Paul Sharits
N:O:T:H:I:N:G (1968) Paul Sharits
T:O:U:C:H:I:N:G (1968) Paul Sharits
Tom Tom The Piper's Son (1969) Ken Jacobs
Serene Velocity(1970) Ernie Gehr
Epileptic Seizure Comparison (1976) Paul Shar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