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Digital Contents Society
[ Article ]
Journal of Digital Contents Society - Vol. 25, No. 11, pp.3485-3493
ISSN: 1598-2009 (Print) 2287-738X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Nov 2024
Received 30 Aug 2024 Revised 21 Oct 2024 Accepted 04 Nov 2024
DOI: https://doi.org/10.9728/dcs.2024.25.11.3485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의 철학: 조선 후기 실경 회화에 나타난 가상세계성과 인식의 변화를 참고로

최원재1, 2 ; 김택경3, *
1동국대학교 사학과 외래강사
2동국대학교 한류융합학술원 전임연구원
3동국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The Educational Philosophy of the Digital Virtual World Curriculum with Reference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Virtual Worldliness and Perception Changes Shown in Real-World Paintings Produced in Late Joseon Society
Won-Jae Choi1, 2 ; Taek-Kyung Kim3, *
1Lecturer, Department of History, Dongguk University, Seoul 04620, Korea
2Research Associate, DUHA, Dongguk University, Seoul 04620, Korea
3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History, Dongguk University, Seoul 04620, Korea

Correspondence to: *Taek-Kyung Kim E-mail: kktmk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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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연구는 가상세계성이 갖는 역사적·사회적 영향을 조선 후기의 실경산수화와 풍속도를 통해 밝히고 가상세계성이 사람들의 인식 양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확인한다. 감상의 영역은 별도로 하고 실경 회화는 가상세계성을 효과적으로 발현시키는 콘텐츠 구현기법으로 그 결과는 실감 콘텐츠다. 이러한 실경 회화의 가상세계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원근법인데, 원근법은 사실에 입각한 가상세계성을 구현했고 이는 사회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적인 전환을 일으켜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산수화와 풍속화의 회화기법 역시 사실성을 극대화해 가상세계성을 구현하는 기법이었고, 실감 이미지의 산수화와 풍속화를 접하면서 당시 대중은 사실 속에서 진실을 찾는 자세를 갖게 되었고, 이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아 사회 변혁을 꾀했다. 가상세계성 구현이 가져온 이러한 사회적·인식적 현상을 참고하여 오늘날의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 역시 시대정신을 끌어내는 교육 철학적 고민을 담을 수 있어야 하겠다.

Abstract

This paper reports the historical and social impact of virtual worldliness through real landscape paintings and genre painting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xplains how virtual worldliness changed people’s perception patterns. Beyond the realm of appreciation, a real-life painting effectively expresses the virtual world, resulting in realistic content. An example that dramatically demonstrates the virtual worldliness of real-world paintings is a perspective that implemented a fact-based virtual world and led to an epistemological shift in how people viewed objects, thus contributing to social change. Additionally, the techniques used to create landscape and genre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maximized realism and conveyed virtual worldliness, causing a shift in recognition of the surroundings. As the public encountered landscape and genre paintings depicting realistic images, they developed an attitude of seeking the truth through facts, which became the spirit of the times. By referencing these socially cognitive phenomena caused by the historical implementation of virtual worldliness, today’s digital virtual world curriculum should incorporate educational philosophy into the zeitgeist.

Keywords:

Late Joseon, Realistic Painting, Virtual Worldliness, Digital AR/VR Curriculum, Educational Philosophy

키워드:

조선 후기, 실경 회화, 가상세계성,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 교육 철학

Ⅰ. 서 론

가상세계성은 현실 세계와 중첩되어 나타나는 또 다른 세계의 일면으로 ‘지금 여기’에 없는 ‘그때 거기’를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를 구현해내는 실경 화가들은 화가로서만이 아닌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가상기술자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는 디지털 기술이 없던 과거에는 이들만이 현실의 세계를 가상으로 가장 실감나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가상세계는 말에서 글로[1], 글에서 다시 그림으로, 여기에 디지털 기술이 덧대어진 시·공간으로서 사진과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상세계는 ‘가상’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가 공감대를 이룰 때 대중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상세계의 필요성은 사회 내 가상화 대상의 실감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한 기대가 충족될 때 세상을 인식하는 요소로서 작동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변화 동력으로 작동하는 가상세계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연구는 그림을 예술의 측면이 아닌 가상세계 구현기술의 측면에서 정의하고, 사실적 회화기법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가상세계성을 갖게 되었는지, 또 이러한 면에서 가상세계성의 결과물인 실경 회화인 산수화와 풍속도가 어떠한 모습으로 현실 세계에서 실감에 기반한 대중적 사회 자각이라는 인식 형성의 과정과 관련되었는가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이를 오늘날 디지털 가상세계 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전의 그림을 디지털로 재현하는 연구 외에 그림에서 가상세계성을 추출하고 사실적 회화기법이 사회 변혁에 일조했음까지 함께 천착하는 가상세계성의 교육 철학적 접근은 본 연구가 처음이다. 메를로 퐁티의 의미의 원천으로서 세계[2]가 본고가 제시하는 가상세계에 대한 접근과 유사하다. 최근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확장현실(XR), 인공지능(AI) 등의 신개념과 방법론이 가상세계의 개념과 함께 나타나 사회경제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고자 정부와 대학은 앞다투어 디지털 가상세계 교육을 시행하고자 하지만 정작 교육 현장에서 가상세계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실감 콘텐츠 구현을 위한 기술 습득 위주로 이해되어 가상세계성을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만들어내는 환상적 디지털의 세계로 치부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디지털 가상세계가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갈까?’에 대한 큰 틀에서 교육 철학적 고민과 교육 과정의 방향성 제시가 더욱 중요하다. 가상세계성이 발현되는 사이에 나타난 대중의 인식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디지털 가상세계 교육 과정에서도 구현기술 습득 이상으로 교육 철학적인 면이 반영되어야 함을 강조하려고 한다.


Ⅱ. 그림의 가상세계성과 인식 변화 동력

2-1 그림의 가상세계성

오늘날 디지털 가상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할 수 있다. 현재의 인류가 당연시하는 디지털 기술들은 모두 아날로그 시대 인류가 추구했던 가상세계의 결과이자 가상세계로의 통로다. 아날로그 가상세계의 현상을 뛰어넘기 위해 인류는 디지털을 개발했고, 지금의 디지털 문화를 만들어냈다. 가상세계의 역사를 천착하다 보면 두 개의 핵심 요소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공의 원격성과 실감성, 즉 ‘마치’ 혹은 ‘~라면’이라는 메타포다. 가상세계의 시·공의 원격성은 대상과 이를 감각하는 이가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의도한 바가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이다.

이러한 가상세계성은 그림에서 가상 잘 나타난다. 전파와 디지털 기술이 없었을 때 원격지를 자기가 있는 곳에서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가상세계성은 그림을 통한 방법이 유일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왕이 청나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그림에 능한 자를 청나라로 보내 직접 그려오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조선의 국왕은 연행 수행원 중 도화서(圖畫署) 화원이 그려온 그림을 통해 실제의 청나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 국왕이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해 마치 그의 실제 공간에 청나라라는 가상세계가 포개져 들어옴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가상세계의 원격성은 사실의 기록과 열람이라는 행위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는 특성을 일컫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지도 제작 역시 가상세계성의 구현기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상세계 구현기술은 누군가에게 ‘그때 그곳’에서 떠난 ‘지금 이곳’으로 ‘그때 그곳’을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가상세계의 원격성은 구현기술로 인해 물성(物性)을 갖게 되는데,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가상세계를 구성하는 감각은 더욱 자연스러운 실감 콘텐츠를 만든다. 글로 전달하는 텍스트 기반 가상세계의 실감 정도가 가장 낮고, 인터넷과 공간 컴퓨팅으로 나타나는 현대의 디지털 가상세계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실감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가상세계 구현은 현실 세계를 시각적으로 모방해서 실감 콘텐츠로 제작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친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로 구현하는 현실 세계는 디지털 기술이 나타나기 이전의 아날로그 구현 방법이 재현한 단계의 실감 모사에서 발달한 결과다. 그러므로 가상세계의 생명력은 사실 재현의 정교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감을 기반으로 하는 가상세계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 전기-전파 기기 발명 이전의 사례로는 그림, 사진, 조각 등이 있고, 전기-전파 기기 발명 이후의 예로는 청각적 실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전화기와 시각적 실감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정지된 그림에서 발전한 활동 사진술(애니메이션)은 보는 이가 원격지를 자기의 영역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가상세계 구현기술로 데이터를 가장 현실적으로 ‘마치’ 대상과 사건이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실감할 수 있도록 시각화한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디지털적으로 시·청·촉각 실감을 구현하는 오늘날의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VR, AR, MR, XR 기술은 모두가 ‘마치’ 여기에 있는 것처럼 실감을 증폭하는 구현기법으로 시각적 실감 영상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다. 이 실감 영상 콘텐츠 구현기술의 연원은 바로 아날로그 회화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세계성을 회화기법에서 찾는 본 연구의 근거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라틴어의 ‘Auribus oculi fideliores sunt.’, 영어 표현의 ‘A picture is worth 1,000 words.’, 러시아어 표현의 ‘лучше один раз увидеть, чем сто раз услышать.’ 등 전 세계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인류의 공통적인 표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때 그곳’의 모습은 문자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으로 다가올 때 가장 효과적임을 알려주는 이 표현들은 문자 데이터가 구현하는 가상세계성의 한계와 시각 데이터가 구현하는 가상세계성의 영향력을 모두 담고 있다. 즉, 시각이미지가 가장 뛰어난 실감 콘텐츠이며 전 인류의 가상세계성에 대한 인식을 오랫동안 지배해왔음을 말해준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시각이미지의 힘을 그림 우월성 효과(Picture Superiority Effect)라고 부른다. 그림 우월성 효과는 사람들이 단어나 구두 정보보다 그림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더 잘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심리학적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전파-전기 장치가 발명되기 이전 인간의 감각 중에서 원격 이동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형상화할 수 있는 감각 구현체, 즉 그림밖에 없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가상세계성을 효과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실감은 시각적으로 먼저 구현될 수밖에 없었다.

시각적으로 발현되는 호모 사피엔스의 가상세계성은 평면에 진짜 현실 세계의 마치 ‘환영(幻影)’을 재현한다는 환영주의로 나타났다.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窓)이다.’라고 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원근법을 그림이라는 창(窓)에 대상을 그리는 행위로 간주했다. 중세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에까지 수백 년 동안 서양 회화기법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이 두 사람이 그림을 창으로 간주했다는 바는 그림을 현실 세계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별도 공간으로 생각했다는 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환영주의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대상에 대한 더욱 정교한 사실적 실감 추구는 이후 사진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회화로부터 구현된 가상세계성은 사진이라는 정지 실사 이미지 단계를 거쳐 활동사진이라는 연속 실사 이미지 단계를 지나 지금의 디지털 영상 기술에서 이전보다 더 생생하게 발현되는 것이다. 사진 기술은 그림의 순간 포착의 어려움을 만회하고, 있는 그대로 대상의 원격성과 실감 정도를 최고조로 높이기 위한 고민으로부터 발명되었는데, 가장 사실적으로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기술로 가상세계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이로써 데이터의 기록과 시각화를 담당하여 가상세계를 구현하던 그림이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사진이 구현하는 가상세계성은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후 개발된 디지털 컴퓨터 시각화 기술은 가상세계 콘텐츠의 물성이 갖는 사실성의 정도를 극대화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예술과 미적 감상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던 회화기법의 역사를 가상세계 구현의 관점에서 고려하고 대입해보면 자연 대상의 시각화에 대한 개인적·사회적인 충족도가 사회 전체의 실감 데이터 리터러시와 가상세계성을 구성함을 알 수 있다.

2-2 그림이라는 가상세계가 일으키는 인식의 변화

그림이라는 가상세계는 실감으로 인해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을 내 눈앞 ‘지금 이곳’으로 소환해서 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현하는 현실의 그림이 사실적일수록 가상세계성은 더욱 부각하고, 이것이 사회에 파급되면 가상세계로서의 그림은 오히려 역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의지해 현실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기준점을 마련하기도 한다.

사실에 대한 더욱 정교하고 입체적인 묘사 즉, 강력한 사실성의 구현은 현실 세계에서의 행위와 사고를 더욱 정밀하게 만든다. 대상을 정밀하게 볼수록 보는 이의 인식의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정밀함은 현상 속에 ‘있는 것’만을 보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대상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하므로 가상세계 구현기술은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비례하여 향상되고 이렇게 향상된 테크놀로지는 다시 또 다른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견인하는 인사이트와 동력을 제공하는 선순환을 만든다.

이에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은 세상을 보는 정밀함이라는 측면에서 인식적 진화를 겪게 되고 이전 세대보다 개척의 범위와 역량 또한 깊어지게 된다. 정밀한 실감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확산하면 사회 내 개인은 주위의 대상에 대해 더욱 정밀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대상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면모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더 정확하고 정밀하게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과 예측의 인지력을 갖추게 되고 구성원들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수요가 커져 사회를 변화시키는 시대정신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관한 적절한 사례가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인류의 가상세계 구현이라는 인식에 크게 영향을 끼쳤는데, 입체적인 모습을 평면에 옮길 때 사용되는 회화기법인 원근법은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발달했다. 동양의 삼원법(三遠法)은 풍경을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으로 구성하여 재현하는 방법으로 3차원의 산수 공간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2차원의 원근법이었다. 삼원법은 인간이 이동하면서 정면, 측면, 상표면 등을 ‘보아 가는’ 풍경이 종합화되어 화면에 전체적으로 구현되는 다점(多點) 투시법에 해당하며, 이로써 화면은 움직임과 계속성을 가지게 된다. 즉, 정지화면과 이동화면을 동시에 갖는다. 삼원법은 정지와 움직임을 모두 실감으로 나타내는 가상세계였다. 삼원법은 단지 투시 원근법만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화면 안에 정신적 공간을 구성하고, 이 정신적 공간을 통해 화면의 유한 공간을 벗어나 무한공간으로 진입하게 하는 가상세계였다. 다시 말해 3원의 공간구성은 그곳에 들어와 있다는 현장감을 가지면서 산수의 공간에서 소요유(逍遙遊)하도록 하는 와유(臥遊)의 공간 구조를 갖게 하는 가상세계였다. 이러한 공간을 인식력이 강화되는 ‘철학 하기’의 세계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3].

15세기 이탈리아의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와 알베르티에 의해 고안된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 지점에서 ‘보이는’ 풍경이 화면에 구현되는 일점(一點) 투시법으로 중세 유럽에 사회적 개인을 나타나게 했다. 이는 강력한 실감 콘텐츠가 사람들의 인식 방법을 뛰어넘게 해주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일점 투시법을 사용해 화가는 자기 눈이 본 것에만 집중하여 그림이라는 방법으로 실감 콘텐츠 가상세계를 구현했고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실을 바라보았다. 화가는 사실만을 투영한 회화기법인 원근법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적 행위로 여겼고, 이렇게 구현된 가상세계가 제공하는 객관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의식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로써 원근법은 단순히 회화기법을 넘어서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론의 역할과 지성 활동으로서 기능했다[4]. 중세 서양 사회는 신이 지배했던 곳이었고, 신의 시선만이 중요했으므로 사물 간의 간격은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근법이 사용되면서부터 중세의 개인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신의 사회에서는 그림으로 주로 현실에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지 않는 신, 성경 속의 캐릭터 등을 가상으로 구현했다고 하면 개인의 사회에서는 훨씬 사실적인 증강현실로 가상세계를 구현했다[5].

이러한 변화는 관념을 보이게 한다는 것과 현실을 보이게 한다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회화기법인 원근법에서 파생한 비(非) 유클리드 기하학, 3D 모델링이 그림을 본격적인 가상세계 구현기술로 만들었고, 시각을 통한 사실성에 입각한 인식이 발달하여 ‘봄(seeing)’이라는 행위에 사회성과 역사성이 부여되기 시작했다[6]. 현실이든 가상이든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시각 자체가 이미 인간에게 사회적으로 주어진 그림 등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직접적인 시각에 앞서 그러한 것을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시각은 생리적인 신체활동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나에게 보이는 가상세계가 사실적으로 시각화될 때 가상세계의 근원인 현실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에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7].


Ⅲ. 조선 후기의 가상세계성과 대상 인식의 변화

3-1 조선 후기 가상세계성 발현 분위기와 실경 이미지

조선 후기 가상세계 구현기술의 바탕에는 시·공의 원격성, 실감 이미지 증폭, ‘마치’라는 메타포의 구현이라는 가상세계성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후기는 여행, 연행(燕行) 등 대중의 도심 및 원격지로의 빈번한 이동과 실경 이미지의 확산으로 본격적인 가상세계성이 무르익은 시대였고, 현실을 세세히 담은 실감 이미지가 대대적으로 확대되어 이를 사회에서 담아낸 시기였다. 조선 후기 가상세계성은 실경 이미지에서 잘 드러난다. 이 그림들은 실제 삶의 영역과 이곳저곳에서 벌어졌던 대중의 삶을 원격지로 퍼뜨렸다.

실경산수화 기법은 고려에서부터 조선으로 이어져 왔고 고려 후기, 조선 초·중기에 고루 나타난다.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등이 대표적이며 계회도(契會圖)와 각종 기록화 역시 실경 회화다[8]. 실경산수화는 17세기에 들어 유행한 기행사경도(紀行寫景圖)에서부터 새로운 경향으로 선호되기 시작했다. 실경산수화의 회화기법은 관념 산수화에서 강조했던 제작자나 감상자의 정신적 고양을 추구하기보다는 감상자가 직접 가서 볼 수 없는 상황을 그리는 행위로써 대리하게 되었고 차츰 현실 세계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점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동향은 회화기법이 현실 세계를 재현하고 나서 이를 옮기는 기술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9].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크게 발흥한 문화적 호기심도 사실적 회화기법을 고양한 원동력이었다[10]. 박지원, 박제가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정밀한 글 묘사로 자신이 견문한 외국의 실상을 알렸다면,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견문 그림은 ‘지금, 여기’서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하는 시각적 실감 이미지 콘텐츠라는 가상세계적 특징으로 시대를 계몽해가기 시작했다. 조천도(朝天圖) 계열의 그림이 갖는 노정에 대한 관념적, 개략적 서술에서 벗어나 마치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 <연행도화첩(燕行圖畫帖)> 등에서 나타나는 극도의 묘사적 표현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연행 관련 기록들의 특징이다[11]. 연행을 통해 다량의 서양화가 조선으로 유입되면서 당시 회화의 양식과 기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12].

Fig. 1.

A painting of a royal envoy’s trip to Yanjing

이러한 시각적 실감 이미지 콘텐츠로서 가상세계성 구현의 또 다른 사례를 정조가 도화서 화원들에게 명한 내용에서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 정조는 1788년 김홍도와 김응환에게 금강산을 그려오라고 했고, 이들은 각각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과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을 제작했다. 그리고 1789년의 <일성록(日省錄)> 기록을 보면 정조는 김홍도를 연행 수행원으로 파견하여 중국의 실제 모습을 한양에서 볼 수 있도록 가상세계를 구현해오라는 명을 내렸다. 김홍도의 환영주의가 반영된 회화기법으로 재현된 증강현실을 통해 정조는 중국의 풍경을 실감 이미지 콘텐츠로 확인했다. 김홍도뿐만 아니라 이명기 등의 조선 도화서 화원들이 연행과 통신사에 수행원으로 합류한 이유는 선진국의 현장을 실감 이미지 콘텐츠로 제작하여 증강현실로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김홍도의 중국 파견에는 화성 건설에 중국의 축성법을 참고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가 반영되었다[13]. 정조가 그림을 예술보다는 모사와 설계도를 위한 기술로 보았고 김홍도도 그림을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하나의 가상 기술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가 그림의 가상세계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를 1783년 그가 조직한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에서도 찾을 수 있다[14]. 차비대령화원은 다양한 화업(畵業)을 담당했는데, 특히 국왕의 말과 글, 신체를 재현하는 일을 전담하여 국왕 자체를 시각화하고 증강현실로 구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정조는 실감 콘텐츠가 현실에서 갖는 위력을 이미 알고 있었고, 차비대령화원을 조직해서 화원들을 통해 증강현실 구현에 의한 사실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다[15].

이렇듯 조선 후기에는 사회 내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이를 표현하는 회화기법이 발달하여 대상의 실감 이미지가 대대적으로 구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이 무렵의 조선 사회를 가상세계성에 노출된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내 일부 계층에 한정되지 않았는데, 1760년대에 이미 오지인 강원도 영월까지 서양화가 유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6]. 이러한 양상은 서구의 환영주의가 조선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와도 무관하지 않다[17]. 이때 제작된 채색필사본 세계지도 그림들은 명암법과 크로스해칭(Cross Hatching), 축도법을 의식한 서양 화풍으로 그려진 다양한 동물과 선박을 묘사한 삽화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구의 지도와 삽화에서 보이는 시각적 기법과 화풍이 조선에 수용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도 사실성을 띠기 시작했다[18].

또한 당시 최고의 화가로 알려진 김홍도의 화풍이 ‘사진에 가까워졌다.’라는 지금의 평가는 당시 사실성에 입각한 실감 콘텐츠 제작에 대한 김홍도의 환영주의적 가상세계 구현 의지를 잘 보여준다[19]. 실제로 김홍도의 사생화는 50mm 표준렌즈나 35mm 광각렌즈를 장착한 카메라의 뷰파인더(view finder)에 그 실경이 거의 같은 구도로 잡힌다. 김홍도는 17세기 이후에 발달한 유럽의 풍경화나 카메라에 담기는 풍경 사진과 유사한 화각으로 실경을 포착했고 생생하게 현장감을 담아냈는데 생활 속 일상 풍경까지 포함했다[20].

실제 대상을 더욱 정밀하게 보기 위한 가상세계 구현기술 발달에 대한 노력은 기술 구현 장치에 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유럽의 원근법 발견 실험이 조선에서도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암실에서 실제적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실험을 했고, 이기양과 이명기는 이를 이용해 실제 대상을 실감 이미지 콘텐츠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이는 있는 대상의 모습을 인공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조선 최초의 영상기구였다. 정약용, 이기양, 이명기 등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상을 관찰하려 했다는 점에서 탈중세적이었으며 시각 중심주의적인 근대 과학 정신을 따랐다[21]. 그들은 디지털 가상세계로 가는 길목에 있던 아날로그 가상세계 구현 기술자들이었다.

3-2 조선 후기 풍속화의 사실성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풍속화풍의 그림이 확산한 이유는 자기의 영역 밖 사실적 대상을 보고 싶어 하는 대중의 염원이 커진 결과였다. 이에 따라 점차 일상과 현실의 사실적 가치를 재인식하는 경향이 사회적으로 나타났다. 사대부들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풍속화를 사실 입증에 대한 그림으로서 이해했는데, 사대부였던 조영석은 그림의 형상성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는 효용적 가치와 정서적 감응을 통한 심미적 가치를 아울러 중시하는 회화관을 갖고 있었다[22].

이 시대에는 풍속화를 비롯한 판소리, 방각본소설(坊刻本小說) 등 감각을 자극하는 매체가 다수 등장했던 것도 실감이라는 가상세계적 테마가 문화 전반에 확산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당시의 풍속화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의 구현이 가져온 사회적 오락 미디어의 역할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여가문화의 다양한 모습이 이인문의 <십우도(十牛圖)>, ≪혜원전신첩(惠園傳神帖)≫ 등의 사인 풍속화의 중요 주제로 등장했던 양상은 풍속화가 오락 대중매체로서도 기능했으며 당시 조선인들이 사회에 대한 인식 상황을 알 수 있는 시각적 증거라고 볼 수 있다[23].

즉물사진(卽物寫眞)론이 회화기법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 것도 실감 콘텐츠 제작에 의한 가상세계 구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 풍속화를 확실히 정립시킨 사대부 윤두서의 실물과 실득(實得)하는 자기화 태도나 조영석의 즉물사진론은 회화기법이 사물의 생생한 모습, 매우 혹사(酷似)한 모습을 살려야만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는 ‘마치’ 대상이 화면 속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착시감(錯視感)을 드러냈는데, 이 착시감이 바로 환영주의의 핵심으로 지금의 디지털 가상세계 구현의 모태가 된다. 조선 후기에 나온 <책가문방도병(冊架文房圖屛)>, <맹견도(猛犬圖)>, <동궐도(東闕圖)>에서 보이는 극사실주의도 18세기의 즉물사진론이 강조한 사실적 회화기법과 화가의 과학적 태도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24].

Fig. 2.

A genre painting by Shin Yoon-bok

Fig. 3.

A genre painting by Kim Hong-do

따라서 조선 후기에 보이는 이러한 회화기법은 유럽의 원근법이 정립된 시기의 회화기법과 마찬가지로 사실성을 최고로 살린 실감 콘텐츠 제작 방식, 즉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둘러싼 후기 조선인의 반응은 중세 유럽에서 원근법이 확산하면서 나타난 대중의 반응과 유사하고, 더 근대적으로는 텔레비전이라는 실감 이미지 콘텐츠의 가상세계 구현 방법의 발명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성 개념이 영역 확장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사회 현상을 보였다. 후기 조선인들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른 이들이 사는 공간을 자기의 영역에서 바라보려는 가상세계성을 실현하고 있었다. 사실적인 풍속화가 보는 이에게 현장에 있는 듯한 실감을 제공하여 사실 판단의 준거로 작동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생동감 넘치는 대상을 중심으로 사실성을 부각한 풍속화는 해학성이라는 사회적으로 정밀하게 ‘봄’을 전하는 가상세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봄’의 영향은 당시 특정한 화가 몇 명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풍속화풍의 사실적 그림은 사대부, 중인 계급, 서민계급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고,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움직였다. 이때의 풍속화가 신분의 귀천과 관계없는 인간 마음의 성정(性情)을 여과 없이 보여주려고 했던 점은 인물동성론(人物性同論)이나 실학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적 회화기법이 보이는 가상세계의 구현은 당시 현실을 반영하는 바탕에 사회의 중요한 덕목을 반영하는데 조선 후기의 회화기법이 보여준 가상세계성은 인간의 개별적 가치를 실사(實寫)로 구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25].

3-3 조선 후기 가상세계성의 교육적 함의

실경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보여준 김홍도의 사실성 이미지 구현은 삶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향을 좇는 관념성에서 벗어나 삶 속 가까이에 있는 조선 풍속을 실제적으로 재현하는 모습이었다[26]. 이런 점에서 그의 사실적 그림은 성리학 이념을 떨치고 평범한 삶의 풍경으로 옮겨진 양태가 읽힌다. 산수화를 디지털 기술적으로 가상세계의 분류법에 따라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관념 산수화는 있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없는 곳을 구현한 것이므로 가상현실(VR), 실경산수화는 있는 곳을 그대로 모사해서 감상자가 실제보다 더 가깝게 볼 수 있게 한 것이므로 증강현실(AR), 진경산수화와 사경산수화는 실제의 대상이 이해되는 바를 확대해 세밀하게 만든 것이므로 확장현실(XR)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가상세계성은 후기로 갈수록 그림에서의 사실성 정도가 높아지고 대중적 접근성이 좋아져 관념 산수화에서 사경산수화라는 가상현실에서 확장현실로의 발달 단계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 사회의 대중은 세상의 거울로 작용하였던 이 그림들 즉, ‘가상세계’를 보고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일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하였던 일을 모두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인식하며 세상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마치 진짜 같은’ 회화기법의 실감 효과가 가져온 조선 후기 대중의 인식은 디지털 기법이 가지고 오는 ‘정말 진짜 같은’ 가상세계를 대하는 지금 대중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27].

조선 후기 실감 이미지 콘텐츠 제작을 통한 가상세계 구현은 대중의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실경산수화와 풍속도라는 실감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증강현실이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사이 조선의 대중이 가상세계를 마주함에 있어 개인적인 만족감 이상으로 사실 관찰과 객관화라는 인식 방법을 얻게 된 것이다. 후기 조선에서 대중은 실감 이미지 데이터 속에서 정확한 정보를 도출하게 되었고 이러한 개인의 힘이 전 사회적으로 발전하여 인식의 변화를 끌어냈다. 그 결과 새로운 대상에서 의심을 벗겨내고 새로움을 마주할 수 있었고, 사실 속에서 진실을 보려는 희구가 커졌다. 실제를 가상으로 자기의 영역에 옮겨놓고 ‘봄’으로써 대상을 현상의 가치 이상으로 달리 생각해 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는 사실과 진짜에 대한 희구가 사회 수면 위로 올라온 시기였고 이를 실경 회화기법이 갖는 가상세계성으로 해결했던 때였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당시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을 의도했고, 그 결과 ‘현실 같은 가상’을 현실 세계 속에 펼쳐 보이면서 개인화에 대한 인식 자각이라는 시대정신을 엮어나갔는데 이것을 지금의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은 반영해야 한다. 조선 후기의 화가들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구현할 때 다르게 ‘봄’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듯이, 시대정신의 확산 통로로서의 가상세계를 가르쳐야 한다. 디지털 기법이 추가된 회화는 더욱 실감나게 대상의 면모를 구석구석 드러내는 가상세계일 수 있다. 단순히 이전보다 발전된 기술력인 디지털로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결과에만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28].

어떤 가상세계 구현기술이든 이것에 수반하는 인지적 움직임이 있는데,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정신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가상세계의 디지털 기술 매뉴얼적 습득과 구사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지털로 실감 이미지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가상세계성을 현현할 때 현상을 초월해서 대상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인식 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지,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어떻게 공감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고민이다.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을 개발할 때 이러한 교육 철학이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Ⅳ. 결 론

본 연구에서는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상세계성을 역사적·사회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세계성이 개인의 인식 변화에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하고 어떻게 사회를 변혁하는 데에 쓰였는지 살펴보았다. 실경산수화와 풍속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조선 후기에 사실성을 좇는 가상세계성 발현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본격적으로 사회에 드러났음을 밝혀보았다. 이렇게 이들 그림의 가상세계성이 사실성의 추구라는 조선 후기 시대정신으로 발현되는 통로가 되었던 사례를 확인하여 오늘날 디지털 가상세계 교육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참고하자고 제안하였다.

오늘날 VR과 AR, MR, XR과 같이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기술들은 실감을 증폭하는 구현기법으로 아날로그 회화기법에 연원을 두고 있다. 디지털로 구현하는 현실 세계는 디지털 기술 이전의 아날로그 구현 방법이 재현한 실감 모사가 발전해온 결과이다. 그림은 원격 이동성을 담보하고 현실을 형상화할 수 있는 감각 구현체로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가상세계성을 효과적으로 발현시키는 실감 콘텐츠이다. 실감 영상 콘텐츠 구현기술의 연원은 바로 아날로그 회화기법이었다.

가상세계의 생명력은 사실 재현의 정교함에 있다. 재현하는 그림이 사실적일수록 가상세계성은 더욱 부각되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파급되면 이제 그림이 오히려 역으로 현실 세계를 규정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정밀한 사실성의 추구는 대중이 대상을 그 자체로만 보는 데에서 나아가 그 이면을 볼 수 있게 유도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의 부단한 발전을 견인하는 선순환의 동력이 되는 역할을 한다.

그림의 가상세계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원근법이다. 서구의 원근법은 화가와 대중이 사실을 바라보게 하였고 사실에 입각한 가상세계를 구현했다. 이는 회화기법을 넘어서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신 중심의 사회에서 그림은 신과 성경 속 인물 등을 가상으로 구현했으나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실적인 증강현실로 가상세계를 구현했다. 원근법에서 파생한 비 유클리드 기하학, 3D 모델링은 그림을 본격적인 가상세계 구현기술로 만들었고 ‘봄’이라는 행위에 사회성과 역사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각은 사회적으로 이미 주어진 그림 등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를 판단의 준거로 삼았다.

조선 후기는 여행과 연행 등 대중이 도심과 원격지로 빈번히 이동하였고, 실경 이미지의 확산으로 가상세계성이 본격적으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표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이를 표현하는 회화기법이 발달하여 대상의 실감 이미지가 대대적으로 구현되었다. 산수화와 풍속화는 이러한 조선 후기 가상세계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이들 회화기법은 서구의 원근법과 마찬가지로 사실성을 극대화한 실감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식, 즉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다. 사실적인 실경산수화와 풍속화는 대중에게 현장에 있는 듯한 실감을 제공하였고 사실을 판단의 준거로 삼게 했다. 사실을 추구한 이들 그림은 사회적으로 정밀하게 ‘봄’을 확산시키는 가상세계의 역할을 하였고, 대중에 사실의 추구라는 방법을 통해 사실 속에서 진실을 보려는 인식의 변화를 끌어냈다.

이상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와 풍속도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현재 디지털 가상세계 교과 과정은 시대정신의 확산 통로이자 동력으로서의 가상세계를 가르쳐야 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만 집착하기보다는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인지적 움직임에 동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현상을 초월하여 그 이면에서 움직이는 교육 철학을 공감할 방법을 더 고민하는 교과 과정이 개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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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최원재(Won-Jae Choi)

2003년:함부르크대학교 대학원 (교육학석사)

2021년:한국학 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육학박사-디지털 데이터 내러티브)

2020년~현 재: 동국대학교 사학과

2024년~현 재: 동국대학교 한류융합학술원

※관심분야:가상세계, AR/VR, 철학, 디지털 교육, 디지털 역사학

김택경(Taek-Kyung Kim)

2006년:북경사범대학 역사학원 (역사학석사)

2015년:북경대학 역사학계 (역사학박사)

2020년~현 재: 동국대학교 사학과

※관심분야:중국근현대사, 동아시아근현대사, 디지털 역사학, 디지털 교육

Fig. 1.

Fig. 1.
A painting of a royal envoy’s trip to Yanjing

Fig. 2.

Fig. 2.
A genre painting by Shin Yoon-bok

Fig. 3.

Fig. 3.
A genre painting by Kim Hong-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