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탐색적 연구: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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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등장한 제페토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콘텐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가상 세계가 제공하는 장치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이 픽션물은 기존의 문화 콘텐츠를 매개 및 모방하면서도 새로운 속성을 지닌다. 본 연구는 그 사례로서 제페토 드라마에 주목하며, 제페토 드라마가 지닌 특성과 제페토 드라마 창작 경험을 살펴본다. 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텍스트 분석, 제작 과정에의 참여관찰, 크리에이터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수행했고, 관찰한 결과를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통해 분석해보았다. 우선, 제페토 드라마는 서사의 짜임새보다는 캐릭터가 중시되는 시뮬라크르적 표층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시뮬라크르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베이스에는 제페토 드라마에서 유통되는 특유의 미학과 설정이 모에 요소로 존재함을 발견했다. 또한, 가상세계의 아바타라는 가상적 존재와 드라마라는 픽션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이용자들은 다중인격과도 같은 다층적이고 유동적 정체성 놀이를 하고 있음을 논의했다.
Abstract
The emergence of Zepeto, a metaverse platform, has led to the development of new storytelling content. Zepeto drama, a fictional work created with virtual devices provided by this platform, exhibits new characteristics while also remediating existing cultural content. This study conducted text analysis of Zepeto dramas, participatory observation in the Zepeto drama production crew, and in-depth interviews with creators to explore the distinct features of Zepeto drama and the experiences of its users. The results were analyzed using Hiroki Azuma’s database consumption theory. Zepeto drama creates a simulacral surface that prioritizes characters over the narrative structure. The database underlying this simulacrum reveals the unique aesthetic moe elements of Zepeto drama. Moreover, in the intersecting realm where the virtual presence of avatars converges with the narrative fiction of dramas, users immerse themselves in multiple personalities, navigating through multi-layered and fluid identities.
Keywords:
Zepeto, Zepeto Drama, Database Consumption, Metaverse, Virtual World키워드:
제페토, 제페토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소비, 메타버스, 가상세계Ⅰ. 서 론
코로나 19로 인해 매개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강화된 환경에서 부상한 단어 중 하나가 ‘메타버스(metaverse)’다. 2018년 네이버가 출시한 ‘제페토(ZEPETO)’는 대표적인 국내 메타버스 플랫폼이다. 얼굴인식, 증강현실, 3D 기술 등을 바탕으로, 제페토 이용자들은 아바타(‘제페토 캐릭터’)를 만들어 ‘제페토 월드’라는 가상 공간 안에서 다른 이용자들과 소통하거나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제페토 월드에는 영화관, 학교, 공원 등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이 구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기 드라마, 영화, 웹툰의 세계관이 반영된 공간도 있다. 더욱이 구찌, 나이키, 디즈니 등의 글로벌 브랜드와 YG, JYP, 하이브 등 국내 엔터테인먼트가 제페토와의 제휴를 통해 관련한 아이템, 공간, 이벤트 등을 제공하면서 많은 이용자들을 유인했다. 이처럼 팬데믹 기간 동안 제페토는 이용자들에게 현실을 대체하고, 때로는 현실보다 더 다양한 소비, 자기표현,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2022년 기준 누적 이용자 3억을 넘기는 글로벌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제페토가 거둔 새로운 기술적, 산업적 성과가 주목받는 가운데, 이용자들이 이 플랫폼을 어떠한 방식으로 향유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언론 보도를 통해 다루어져 온 경향이 있다. 가상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체험, 다른 이용자와의 경계 없는 소통, 아바타 꾸미기의 즐거움과 대리만족 등이 Z세대의 새로운 놀이 문화 속에서 조명되었다. 한편으로는, 마케팅이나 특정 분야의 산업화 차원에서 제페토의 활용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페토 플랫폼과 사용자 경험에 대한 분석이 다수 이루어지고 있다[1]-[3]. 제페토 이용자들의 특수한 플랫폼 경험을 들여다보는 질적 연구 또한 시도되고 있으나[4],[5], 제페토 이용 경험을 유형화하는 것 이상으로 이용자들이 해당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제공되지는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제페토 이용자들의 인식과 경험을 더 깊이 있게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른바 ‘제페토 스토리텔링 콘텐츠’라고 명명할 수 있는 대상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제페토에서 창조된 공간, 설정, 아바타, 아이템 등을 활용하여 특정한 포맷과 서사를 갖춘 형태로 제작된 콘텐츠인 제페토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제페토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더욱 확장된 놀이와 스토리 경험을 드러낸다. 제페토 스토리텔링 콘텐츠의 하위 장르로는 제페토 드라마, 제페토 브이로그, 제페토 예능이 대표적이다. 이름 그대로, 각각 드라마와 브이로그, 그리고 예능 방송의 형식과 내용을 차용하면서도, 제페토 캐릭터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러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의 제작은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나 ‘심즈(The Sims)’ 등 기존의 가상세계 서비스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독특한 양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중 본 연구의 대상인 제페토 드라마란 이용자가 직접 제페토 캐릭터를 활용하여 연출한 드라마를 일컫는다. 제페토 스토리텔링 콘텐츠 중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란 당대의 정서를 매개함으로써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제페토 드라마는 개인 이용자가 혼자 여러 캐릭터를 동원하여 제작되는 경우도 있고, 여러 이용자들이 제작 크루를 결성하여 함께 촬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하는데, 전자의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제페토에서 복수의 계정 또는 복수의 캐릭터 슬롯을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여러 캐릭터를 활용하여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다. 또는 혼자서 제작을 하더라도 제페토 내에서 드라마 출연을 희망하는 다른 이용자를 대상으로 배우 모집을 한 후, 해당 이용자와 서로 팔로우 관계를 맺고 촬영하는 경우도 있다. 제페토 포토부스에서는 자신과 팔로우 관계에 있는 다른 이용자를 언제든지 소환해서 함께 촬영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작 기간 동안 배우 역할의 이용자가 배역에 맞게 캐릭터 커스터미아징을 하고 있기만 하면, 제작 역할을 하는 이용자가 자유롭게 드라마에 필요한 장면들을 촬영할 수 있다. 한편 제작 크루가 함께 제작 과정에 관여하는 경우에는 이용자들이 제페토 내 가상 공간인 제페토 월드에 모여서 촬영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제작 크루 내에서의 많은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단편이나 짧은 패러디물에서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
제페토 드라마 또한 주요 제페토 콘텐츠 크리에이터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언론에서는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주로 10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라는 점이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인터넷 소설의 재탄생 및 영상화로 평가되며, 드라마 제작을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크리에이터 문화도 조명된 바 있다. 반면 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이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 정도 외에 제페토 드라마 자체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유일한 연구로 보이는 송지혜·차진명의 연구[6]는 제페토 드라마 창작의 구조가 기존 영상문학콘텐츠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페토 드라마를 하나의 (영상)문학콘텐츠로 바라볼 수 있음을 주장하며, 제페토 드라마를 학술적 논의의 장 안으로 끌어들였다. 본 연구는 이 논의를 더욱 확장하는 시도이다.
본 연구는 제페토 드라마라는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탐색적 연구로서, 그 특성과 의미를 탐구하며 ‘제페토 드라마란 도대체 무엇인가?’ 또는 ‘제페토를 어떤 콘텐츠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페토 드라마의 새로우면서도 기존의 문화 콘텐츠와 연계된 콘텐츠 속성을 파악함과 동시에 드라마 창작 경험이 어떻게 향유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Ⅱ. 제페토 드라마 연구를 위한 이론적 맥락과 틀
2-1 인터넷 소설의 계보를 잇는 제페토 드라마
제페토 드라마는 메타버스라는 기술적 공간이 부상함에 따라 등장한 완전히 혁신적인 콘텐츠라기보다는, 웹 2.0 환경이 유발한 창작 문화의 연장선에서 그 특성을 조명해볼 수 있다. 매스미디어 시대의 소비자 문화를 넘어서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생비자(prosumer)의 참여문화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7].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비록 리터러시와 접근성의 격차가 존재하더라도, 온라인 공간에서의 자기표현에 대한 진입장벽은 낮아졌다. 그리고 이와 함께 멀티미디어를 동원하여 개인이 생산하는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 생산물이 공유되어 왔다.
제페토 드라마는 웹 2.0 환경에서 탄생한 담화 양식인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비(非)디지털 환경에서의 서사와 구별되는 의의를 갖는다[8]. 우선, 디지털 환경에서는 소수의 전문적 창작자들에 의해서만 이야기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일정 리터러시를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이야기 생산자가 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다감각적인 담화 양식을 동반한다. 디지털 스토리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미지, 소리, 영상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다. 디지털 환경이 제공하는 모듈성(modularity)은 이용자가 다양한 감각 요소들을 취사선택적으로 조합할 수 있게 해준다. 제페토 또한 언어뿐만 아니라 음악, 이미지, 제스처 등을 이용한 다중모드 텍스트라는 특징을 지니며, 이러한 특징이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젊은 세대의 리터러시 및 의사소통 양상과 조응한다고 평가된다[9]. 더불어,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상호작용적 소통을 동반한다. 디지털 스토리는 개인의 발화에 머물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이야기를 끌어옴으로써 ‘이야기판(story champ)’을 형성한다[10]. 하나의 장 속에서 생산-소비-비평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11], 개인의 이야기는 집합적 이야기로 확장되어 특정한 집단 정체성 및 감성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디지털 스토리텔링 문화 중에서도 본 연구는 인터넷 소설에 주목함으로써 제페토 드라마를 학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인터넷 소설은 웹 2.0 환경에서 나타난 하나의 문학 장르이자 놀이이다. 국내의 경우 2000년대 초반 소위 ‘귀여니 신드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인터넷 소설은 당시 1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통신어와 이모티콘을 작품 안에 도입함으로써 ‘문자문학에서 전자문화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12]. 제페토 드라마는 서사적 차원에서 인터넷 소설의 주류 서사와 유사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작가의 권위를 넘어 다양한 개체가 모여 만들어지는 집합적 서사[13]라는 점에서 인터넷 소설의 의의를 공유한다. 이에 제페토 드라마가 부상하면서 인터넷 소설과의 비교 속에서 이해가 이루어져 왔다[14],[15]. 아래 인용은 제페토 드라마 크리에이터 ‘월간’이 2022년 12월 외교부에서 주최한 “글로벌 혁신을 위한 미래대화”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한 발화의 일부이다[16]. 제페토 드라마가 인터넷 소설을 재매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가 얼마 전에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줄거리를 짧게 말씀드리자면, 지구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다른 행성으로 넘어가서 자신이 지구의 마지막 이야기 전달자가 되는 그런 줄거리인데요. 어떻게 보면 제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콘텐츠 문화를 현대 시대의 영상으로 전달을 하는 거죠. [⋯] 더 나아가 제페토 드라마라는 콘텐츠 문화를 새로 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점점 발전하는 제페토와 함께 그 시절 익명의 명작 제작자에 그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 소설과 그 하위 장르로서의 팬 픽션(fan fiction)이 문학으로서 가치를 갖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듯, 제페토 드라마에 대해서도 그 논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기에 10대들의 피상적 놀이 정도로 여겨질 수 있는 제페토 드라마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 일단 이것은 제페토라는 메타버스 공간이 이용자들에게 얼마나 몰입 가능한, 실재감을 주는 공간인가와도 연결된 문제다. 가령, 이아름·오민정[17]은 메타버스가 인간의 창작과 유희, 그리고 이를 통한 감정의 교류를 가능케 함으로써 ‘문화적 인간(homo culturalis)’의 생활환경이 될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즉, 가상의 공간인 메타버스가 현실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이해되는가의 문제는 그 공간의 창조적, 문화적 가치 담론이 생산되는가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제페토 드라마를 메타버스 문학 콘텐츠라고 규명한 송지혜·차진명[6] 또한 창의성과 몰입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제페토 드라마 크리에이터들은 해당 세계와 그곳에서의 경험에 대한 몰입뿐만 아니라 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수용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몰입감을 형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메타버스 드라마는 창의적 활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제페토 및 제페토 드라마의 유의미성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시도된 바는 있으나, 대개는 언론에서 소개되는 트렌드 차원 이상으로 깊이 있는 논의의 대상으로서 포획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특정 연령대, 특정 플랫폼 이용자들에 국한하여 생산 및 수용되고 그 내용 또한 특수한 미학과 감수성으로 인해 주류적인 대중문화로의 진입장벽이 있다. 대개 하위문화적 실천에 대해 그 의미의 발굴이 어렵듯, 제페토 또한 10대 청소년 중심의 하위문화로서 그들의 표현과 소통 방식을 학술적 장으로 번역해낼 언어가 부족해 보인다. 이에 본고는 제페토 드라마가 지닌 가치에 대한 논의의 틀을 인터넷 소설에 대한 선행 연구들[18],[19]이 의존하는 설명 체계 중 하나에서 찾고자 한다. 바로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가 이야기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이다[20].
2-2 데이터베이스 소비론
아즈마가 개념화한 ‘데이터베이스 소비’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 요소가 주요한 소비 대상이 되는 양상을 지칭한다[20]. 아즈마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통해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제기했으나, 이것이 하나의 하위문화에 머무르는 현상이 아니라 전후 일본이 형성해온 소비 구조와 생활 양식을 아우른다고 본다. 더 나아가, 일본을 넘어 더 큰 포스트모던 문화의 흐름과 호응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국내에서도 웹 드라마, 온라인 게임, 아이돌 팬덤, 대중문화 속 캐릭터 등 젊은 세대가 형성하는 포스트모던 소비 문화에 대해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이 적용된 바 있다[21]-[25]. 이때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이 적용되고 있는 영역의 주요한 특징을 ‘피상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문화들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유의미성을 지니기보다는 혼종적인 기호와 얕은 서사가 반복재생산되는 문화적 산물 및 현상들이 있다. 아즈마는 이러한 영역을 독해하는 데에 있어 기존의 구조주의적 시각이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기존의 관점으로는 얼핏 피상적인 유희와 놀이, 때로는 ‘잉여와 병맛’[24]으로 지칭할 만한 것 너머의 논의가 어려운 영역에 대해서는 소비 구조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아즈마의 논의가 시사한다.
우선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의 배경이 되는 콘텐츠 구조의 핵심은 “시뮬라크르의 전면화와 커다란 이야기의 기능부전”[20]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아즈마의 독창적 논의라기보다는 그 자신 또한 의존하고 있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 Lyotard) 등이 제시한 포스트모던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커다란 이야기’란 근대를 지탱해온 가치와 규범, 이념 등을 포함하는 거대 서사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하나의 거대한 규범이 유효성을 잃고 그 자리를 ‘작은 이야기들’이 대체하면서 나타났다. 작은 이야기들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시뮬라크르’적 존재론을 지닌다. 하나의 큰 서사가 원전으로서의 권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복제본이 양산되어 원본과 복제본 사이의 구별을 흐리고 있는 양상이다. 이에 문화 작품이 생산되는 구조도 특정한 원전과 작가에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모방과 표절이 범람하는 형태를 띤다.
이로써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근대의 세계상은 하나의 수목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심층에 존재하는 거대 서사로부터 표층의 여러 작은 이야기들이 생산된다. 따라서 근대의 체계 속에서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것은 표층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심층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즈마가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던의 세계상인 데이터베이스 모델은 중심점으로서의 심층이 소멸하고 다양한 기호가 표층에 난립해 있는 형태이다[20]. 이에 수용자들은 심층의 커다란 이야기를 해독하려 하기보다는, 표층의 이야기들이 의존하고 있는 구성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소비한다. 즉, 특정한 설정이나 캐릭터 등 비이야기적 요소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것이다. 앞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지닌 다감각적 담화양식 또한 이러한 데이터베이스적 모델과 조응하여 부각되는 특징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을 아즈마는 ‘모에’로 제시한다[20]. 모에란 표층에 드러난 특징들로서 소비자를 매혹하는 요소들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속 캐릭터들의 고양이 귀와 꼬리, 메이드 복장, 삐친 머리 등의 시각적 요소들을 들 수 있다. 오타쿠 문화에서 특정 작품의 매력을 결정짓는 것은 서사적인 완성도보다는 이러한 모에 요소들이다. 현대 소비 구조의 표층에 드러나 있는 것들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이미지 기호, 설정, 스타일, 서사 요소 등의 모에 요소들을 재조합시킨 시뮬라크르다. 종합하자면, 데이터베이스 소비 모델은 2층의 구조를 지닌다. 표층의 시뮬라크르는 수많은 복제된 작은 이야기들과 캐릭터로 형성되어 있고, 이러한 시뮬라크르를 조합해내는 재료로서의 모에 요소가 곧 ‘커다란 비이야기’로 지칭되는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한다.
이러한 논의가 인터넷 소설에 적용되었을 때, 인터넷 용어, 이모티콘, 비속어 등을 통해 나타나는 세대적 감정-인지와 향유 문화, 극중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미소년 캐릭터 등이 모에화되어 동시대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한다[18]. 기존 문학계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작은 이야기, 또는 비이야기 속에서 10대들이 공유하는 환상과 현실이 드러난다. 또한, 온라인 팬픽의 경우 특정한 원전에 대해 팬들이 밀렵 및 전유하며 생산되는 것이 특징이다[7]. 이 과정은 팬픽 시장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 조합, 차용하는 행위를 통해 원전에 숨어 있는 잠재성을 실현해내는 데이터베이스 소비라고 할 수 있다[19].
제페토 드라마의 특성을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제페토 드라마가 인터넷 소설의 계보에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즈마는 데이터베이스 소비가 웹의 논리와 닮아 있다고 말한 바 있다[20]. 보이지 않는 잠재적 데이터가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시각화되고 이것이 특정한 위계 없이 하이퍼텍스트적으로 병렬된 구조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맥락에서 아즈마가 제시한 ‘과시성(過視性)’이라는 개념은 제페토 드라마에서 유의미하게 적용될 수 있다. 과시성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표층의 논리가 ‘과도하게 가시적’이라는 의미에서 조어된 개념이다. 모에 요소들이 무한대의 조합이 가능한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하는 온라인 공간은 과시성이 강화되는 공간이다. 제페토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플랫폼이 유도하는 재조합의 논리를 바탕으로, 서사를 통해 잠재적으로 욕망되는 속성들을 모에화하여 보이는 형태로 만드는 과정에서 크리에이터의 욕망이 ‘과시화’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관련해서 다시 후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제페토 드라마는 어떤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 연구 방법
제페토 드라마를 탐구하기 위해 텍스트 분석, 참여관찰, 심층 인터뷰의 다중적 연구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제페토 드라마들의 텍스트적 특징을 관찰했다. 선행연구[6]와 연구자의 관찰, 그리고 유튜브 채널 분석 웹사이트인 ‘블링(vling)’에서의 채널 차트를 종합해볼 때, 현재 활성화되어 있는 최상위권의 제페토 드라마 채널은 대략 표 1과 같다(2023년 6월 30일 기준). 이들 크리에이터가 제작한 드라마 중 조회수와 더불어 대표성 및 화제성을 고려할 때 주요하게 관찰할 작품을 표 1에 나열한 바와 같이 선정했다. 제페토 드라마의 서사, 인물, 배경, 기호, 대사 등을 통해 어떤 요소가 두드러지거나 반복되는지에 주목하였다.
또한, 연구자는 2022년 4월 제페토 드라마 크루에 가입하여 드라마 제작 활동에 참여해보았다. 제페토에는 이용자들의 커뮤니티인 ‘크루’를 개설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크루 분류 중에는 ‘배우 모집’이라는 탭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이용자들이 제페토 콘텐츠를 만드는 시도를 한다. 연구자가 참여한 드라마 크루의 경우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금 우리 학교는>(2022)을 모방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었다. 24명이 참여하는 크루가 결성되고 배역 분담이 이루어진 후 오픈카톡방을 통해 단체 소통, 제페토 메신저를 통해 크리에이터와의 1:1 소통이 이루어졌다. 크리에이터는 배우들에게 커스터마이징을 요청하거나 제페토 내 특정 맵에 접속하라는 안내를 하고, 촬영시에는 채팅창으로 특정 포즈나 제스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한 후 녹화 기능을 이용해 촬영한다. 이를 통해 제페토 드라마에 참여하는 이용자들의 소통 과정을 직접 경험 및 관찰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심층 인터뷰의 경우, 제페토 드라마를 제작하는 7명의 크리에이터 이용자와 드라마에 배우로 참여한 적 있는 이용자 3명을 대상으로 수행했다. 크리에이터의 경우 앞서 표 1에 제시한 내용을 토대로, 제작 경험과 팔로워가 많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접촉하여 모집했고, 그 외에 유튜브에서 ‘제페토 드라마’를 검색어로 넣었을 때 조회수상 상위에 있는 채널의 운영자를 대상으로 모집을 시도했다. 배우 경험이 있는 이용자의 경우 크리에이터를 통해 소개받거나 연구자가 가입한 몇몇 드라마 크루에서 모집했다. 모두 고등학교 재학 연령인 17세 이상만을 인터뷰 참가자로 표집하였고, 성별에는 의도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여성 이용자만이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는 반구조화된 질문지를 바탕으로 진행했다. 인터뷰 참가자당 60∼80분 정도의 인터뷰를 화상 시스템 줌(Zoom)을 이용하여 각 1회 진행했다. 모든 연구 진행은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의 승인을 받아 이루어졌다. 인터뷰 참가자들의 정보는 표 2와 같으며, 모두 익명화하였다.
Ⅳ. 연구 결과
4-1 패스티시적으로 구성되는 서사와 캐릭터의 시뮬라크르
제페토 드라마에는 두 가지 장르가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로맨스다. 로맨스는 다른 장르나 이야기 요소와의 결합이 용이한 보편적 소재이므로 그 자체로 특기할 만 한 점은 아니다. 두 번째로 뱀파이어, 좀비, 요정, 저승사자 등 비인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가 눈에 띤다. 이는 제페토의 아이템이나 이벤트에 의해 유도되는 바이기도 하다. 제페토에서는 좀비나 할로윈 컨셉, 공포 공간 등을 통해 현실에서는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놀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26], 이를 이용한 비인간 설정 스토리가 많이 제작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장르물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기존 대중문화 콘텐츠 내에서 참조할 수 있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리에이터 인터뷰 참가자들은 평소 드라마(B, E), 웹 드라마(D, E), 웹툰(A, B, F)을 즐겨보며, 그러한 콘텐츠를 소비한 경험이 제페토 드라마 제작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동시기에 유행하는 콘텐츠나 서사를 모방하고 세부적인 요소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드라마 제작을 시도하는 것이다. 즉, 제페토 드라마는 기존의 여러 문화 콘텐츠의 요소들이 패스티시(pastiche)적으로 결합해 만들어지는 2차 창작물의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어, A는 자신이 즐겨보는 로맨스 웹툰의 주요 줄거리에 드라마 <도깨비>(2016)의 비인간 캐릭터 설정을 추가했고, E는 웹 드라마 <리얼 타임 러브>(2020)와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2022)의 인물과 특정 씬들을 차용했다. D는 다른 제페토 드라마 속 좀비 세계관을 따라 만들어보면서 인물 커스터마이징은 BTS의 멤버 ‘뷔’를 참고했다.
일단 제가 보는 웹툰들, 로맨스 장르 그런 게 조금씩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네이버에서 <동생 친구> 많이 보고, <이번 생도 잘 부탁해> 그런 거 되게 많이 보고, 또 <연애 혁명>도 많이 보고... (A)
제가 평소에 로맨스 드라마나 웹툰을 자주 보고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하면 설레는지, 어떻게 나쁘게 나오면 나빠 보이는지 알게 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B)
연구자가 참여한 드라마 크루에서도 단체 메신저를 통해 참조물에 대한 의견 공유가 이루어졌다. 한 크루원이 <지금 우리 학교는> 컨셉으로 제페토 포토부스에서 촬영된 포스트를 공유하고, 또 다른 크루원은 당시 제페토 릴스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지금 우리 학교는> 패러디 영상물을 공유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원전으로 삼으면서도 다른 2차 창작물들을 또 다른 참조 대상으로 공유하며 다시 3차, 4차의 모방과 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패스티시적 제작 방식으로 인해 제페토 드라마들은 대체로 유사한 소재와 표현 방식을 바탕으로 하는 시뮬라크르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결코 무질서하지 않고 데이터베이스가 제어하는 흐름 속에서 좋은 시뮬라크르와 나쁜 시뮬라크르의 선별이 이루어진다는 아즈마의 논의대로[20], 일견 획일적으로 보이는 제페토 드라마 또한 세부적 요소를 바탕으로 완성도에 대한 인식 및 추구가 이루어진다. 이때 그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이 서사의 완성도는 아니라는 점이 관찰된다. 제페토 드라마의 전반적인 기획에서 서사가 갖는 중요성은 미비해 보인다. 우선,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에 대해 질문했을 때 많은 인터뷰 참가자가 ‘소재-등장인물-스토리’의 순으로 작업 과정을 소개했으며, 특히 등장인물 설정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더 구체적이었다.
드라마 주제를 정하고,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것들, 캐릭터 커스텀, 입힐 옷 정하기 등을 해요. 영상으로 만들 때는 주말에 한 편의 줄거리를 정하고 대사를 짠 다음 대사를 복사해서 편집기로 옮겨요. (B)
처음에는 제가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서 짜고, 그다음에 드라마에 관한 등장인물에 대해서 이름, 성격, 나이 등등을 정해줍니다. 등장인물에 맞는 캐릭터를 제가 직접 만들기도 하구요. 그다음은 대본을 작성해서 편집 앱에다가 복사 붙여넣기 한 다음에 [⋯] (C)
일단 처음에 시나리오를 짜는데 거기서 어떤 등장인물을 쓸 것인가, 그리고 나이랑 학교 이런 것도 쓰고 성격도 정하고, 옷 같은 것도 정해놔요. 그리고 대본 쓰고 제페토에서 인물에 맞는 아바타를 만들어요. (D)
또한, 배우들을 모집하여 드라마 제작을 할 때, 대본이나 기본적인 줄거리가 공유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우 모집 방에는 드라마의 제목과 함께 필요한 역할이 “여주/남주/여주친구1/여주친구2/일진1/일진2”등과 같은 형태로 나열되어 있고 배우들은 정확한 내용을 모른 채 어떤 역할을 맡을지만 선택한다. 크리에이터에게 서사의 전개 과정이나 대본에 대해 질문하지도 않는다(H, I, J 인터뷰 응답 및 참여관찰 내용 기반). 서사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없”(J)기 때문에 크리에이터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제작물을 보고 실망해본 경험이 없다는 응답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제페토 드라마 제작의 중추는 서사 구축보다는 캐릭터의 구현이다. 캐릭터의 대두는 서사의 중요성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20]. 이야기가 아닌 데이터베이스가 소비되는 과정은 데이터베이스의 모에 요소들을 조합하여 나타난 캐릭터에 대한 열광적 소비를 동반한다. 이러한 논의는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데이터베이스형 캐릭터’나[21] TV 시트콤 속 캐릭터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양상[24]에 대한 논의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더욱이 제페토 드라마의 경우에는 아바타 기반 플랫폼에서 파생된 콘텐츠인만큼, 이야기 소비보다 캐릭터 소비가 핵심이다. 제페토가 제공하는 가상의 장치들과 아이템은 다양한 요소의 조합을 통해 섬세한 단위의 커스터마이징을 가능케 한다.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스토리’보다는 ‘텔링’을 하는 방식, 특히 다감각적 담화양식[9],[27]에 의존한 텔링의 방법이 강화되는 양상이다. 이로써 제페토는 서사라는 심층이 약화되고, 모방과 복제로 이루어진 이야기와 캐릭터의 시뮬라크르가 전면화된 양상을 띤다.
4-2 제페토 드라마의 데이터베이스와 모에 요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시뮬라크르가 파생되어 나오는 데이터베이스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제페토 드라마에는 그 주 제작자이자 수용층인 10대 여성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특정한 미학 및 설정이 존재한다. 이를 제페토 드라마의 모에 요소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제페토 드라마에서는 서사적 차원에서의 완성도를 위해 특정한 설정 및 장치가 동원되기보다는 모에 요소를 활용하기 위해 서사가 동원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특정한 시각적 기호가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제페토 드라마의 모에 요소는 제페토 드라마 판에 들어와 있는 이용자들에게는 가장 즐거움을 주는 요소이지만, 제페토 드라마에 대한 진입 장벽을 만드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우선 캐릭터 외양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미학 및 이에 기반한 설정들을 살펴보자. 인터넷 소설이 10대들에게 “‘우리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의 가장 직접적인 실재(the Real)로서 온라인 화면에 현전(presentation)하는 것”[18]이라고 할 때, 그 현전은 여전히 언어로만 구현되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소설의 독자들은 ‘가상 캐스팅’이라는 놀이를 만들어 연예인이나, 인터넷 ‘얼짱’과 같은 셀러브리티의 사진을 가져와 등장인물에 대한 자신의 상상을 공유하곤 했다. 제페토 드라마는 가상 세계의 자원을 재조합하여 잠재적 요소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장이다. 모에 요소가 의존하는 감정 구조가 소비자의 척수반사적 반응이라고 할 때, 구체화된 시각적 모에 요소는 그 텍스트를 향유하는 집단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요소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논의한 과시성의 개념은 제페토 드라마의 적극적 시각화와 조응한다. 제페토 드라마는 수용자가 욕망하는 잠재적 요소들이 모에화되어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제페토 드라마에서 모에화된 아름다움의 구체적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인터뷰 참가자들은 정확히 언어화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제 기준에서 봤을 때 딱 예쁜데, 잘생겼는데 이런 느낌”(A), “제 취향”(C), “그냥 눈 크고 코 작고 이런 느낌”(G)이라는 추상적 수준에서만 설명되었지만, 제페토 내에서 공유되고 있는 특정한 미학이 존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더욱이 극 중 여러 등장인물의 외모가 매우 획일화되어 있는 모습도 관찰된다. 가령, 제페토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종잇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의 피부색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C와 E는 커스터마이징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고 말하며 제페토 내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규범 및 행위유도성(affordance)이 있음을 암시했다. 또한, 과거에는 그림 1처럼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신체 비율과 얼굴 표현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면, 제페토에서 실제 사람과 유사한 신체 비율을 옵션으로 제공하고 커스터마이징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는 기능들이 지속적으로 보완됨에 따라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캐릭터의 외양도 달라지고 있다. 그림 2는 2023년 6월에 유튜브에 ‘제페토 커스터마이징’으로 검색하여 나온 인기 영상 썸네일들로, 최근 2년 이내에 만들어진 제페토 드라마에서 자주 발견되는 전형적 캐릭터 외양을 보여준다. 흰 피부, 옆으로 긴 큰 눈, 작은 코, 살짝 올라간 입꼬리 등이 특징이다. 이런 시각적 모에 요소들은 일본 망가, 카메라 필터 어플리케이션, 케이팝 아이돌 등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적 디지털화된 미의 양식을[28]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점차 정교해지는 커스터마이징과 이에 대한 튜토리얼의 양산은 이러한 모에 요소를 공유하는 더 많은 캐릭터의 복제를 낳으며 그 시각성을 강화해가고 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의 외양이 자주 변동되는 양상 또한 하나의 모에적 속성이다. 제페토는 단순히 아바타를 만드는 것을 넘어 아바타를 변환하는 커스터마이징이 그 주요한 이용 동기로 꼽힌다[1]. 외모의 변화는 서사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다. 관찰 대상이 된 제페토 드라마들은 대체로 권선징악의 서사를 보여준다. 이때 극 초반에서 악역의 괴롭힘으로 인해 피해자 위치에 있는 여주인공의 외모는 감춰져 있다가, 특정 계기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면서 악역에 맞서는 힘을 갖게 된다(예를 들어 <내 남편은 일진>, <당신의 연애 세포를 살려드립니다>, <멸망소녀나라>). 여주인공의 감춰진 미모가 드러나는 설정은 소녀만화(쇼죠망가, 少女マンガ)에서부터 흔히 있던 장치다. 이것이 제페토의 커스터마이징 논리가 유도하는 정체성 변환의 재미로 인해 극대화된다. 여주인공의 외모 변화는 잠재적(virtual) 정체성을 실현한다는(actualize) 가상 공간의 정체성 원리이자 과시성의 원리와도 궤를 같이 한다.
이에 대해 모에화의 차원에서 더 특기할 만한 점은, 인물의 외모 변화가 서사와 별개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림 3은 극 중 하루 안에 여주인공의 머리 스타일이 두 번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주인공의 머리 스타일 변화에 대해 짧은 언급이 이루어지지만, 서사의 전개와 관련이 있는 설정이나 대사는 아니다. 다른 작품에서는 씬이 바뀌면서 머리 색깔이 변하거나(<내 남편은 일진>), 에피소드마다 여주인공의 머리 스타일이 변화기도 한다(<당신의 연애세포를 살려드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서사의 개연성 차원에서 지적되거나 문제시되지 않는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서사의 개연성은 제페토 드라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요소라거나 수용자들에게 주요한 향유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체성 변환, 특히 커스터마이징을 통해 ‘변화무쌍한(protean) 자아’[29]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제페토에서의 놀이이자 감성으로서, 이것이 제페토 드라마의 데이터베이스에 작동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소재 및 설정 차원에서 눈에 띄는 모에 요소는 ‘일진’이라는 존재다. <일진이 착해지는 과정>, <내 남편은 일진>, <일진이 나랑?> 등과 같이 제목에서부터 일진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일진이라는 용어를 전면적으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남자 주인공이 이와 유사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많다(<꽃보다 제페토>, <달의 공주>).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일진이라는 소재가 내세워지더라도, 이것이 서사를 추동하는 주요 요소가 되거나 실제 일진과 관련된 폭력적인 언행이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집단적 괴롭힘이나 폭력이 소재로 등장하더라도 일반적인 권선징악의 서사로 귀결되는 정도이고 해당 작품의 특수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일진의 행위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데도 일진이라는 소재를 내세우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진 장르가 유행해서”(C), “그렇게 해야 뭔가 재밌어져서”(E)라는 식의 응답 외에는 크리에이터들 스스로도 찾지 못했다. 일진이라는 소재가 제페토 드라마의 창작자와 수용자 집단이 반응하는 즉각적 기호이자 관습체계이기에 서사와 해리된 채로 표상되는 양상이다.
일진이라는 캐릭터 및 설정과 연결고리를 갖는 것은 폭력의 서사보다는 오히려 극 중 이성애 로맨스 관계를 둘러싼 다른 모에 요소들이다. 로맨스 장르의 제페토 드라마에는 “오늘부터 꽃단비는 나의 여친이다. 단비를 건드리면 날 건드리는 걸로 알지.” (<꽃보다 제페토>), “앞으로 김아린 건들면 가만히 안 있습니다.” (<일진이 착해지는 과정>), “한 번만 더 내 여친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일진이 나랑?>)와 같이 로맨스 관계를 선언하는 남주인공의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일진이라는 캐릭터의 폭력성이 로맨스물 속에서 이성애규범성 및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결합하여 모에화된 양상이다. 이러한 유형의 대사 및 장면은 여러 제페토 드라마에서 시뮬라크라적으로 존재한다. 크리에이터들은 시각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남성에게 특정한 힘을 부여하고, 그 힘에 의존하는 ‘곤경에 처한 여성(damsel in distress)’ 모티프에 대한 선호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 모티프는 관련하여 모에화된 다른 시각적, 서사적 요소들의 반복 재생산으로 이어진다.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재미있는 부분에 대한 질문의 답] 여자 주인공이 딱 위기에 처했을 때 남자 주인공이 딱 들어가서 그런 부분이 되게 많지 않았나... 많이 설레하고 (A)
어떻게 하면 좀 더 남자다워 보이는지... 또 아이템이 제페토는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좀 더 남자의 상징을 좀 드러내려면 목젖이라든지, 아니면 손의 힘줄 있잖아요. (F)
이런 모에 요소는 제페토 드라마가 기존 로맨스 드라마나 인터넷 소설 등의 데이터베이스를 일부 재매개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변화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크리에이터들은 일진을 하나의 설정으로 활용하면서도 그것이 서사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도록 의식하며 제작을 하고 있다. C는 ‘일진’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드라마를 제작한 적 있지만, 어린 시청자들을 고려하여 일진 행위가 포함되지는 않도록 했다고 말했다. E 또한 남주인공이 일진인 드라마를 제작했지만, 자신의 드라마가 “불량 콘텐츠”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캐릭터 설정만 일진으로 했다고 말했다. 욕설이나 비도덕적 행동을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 주의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A, C). 기존의 인터넷 소설이 일진을 낭만화했던 관습을 탈각한 양상이다. 제페토 드라마가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 속에는 일진이라는 ‘형식’은 작동하지만 그 ‘내용’은 지워져 있다. 크리에이터들은 자기 콘텐츠의 도덕성과 시청층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자기검열하며 데이터베이스를 변형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의미한 작품들이 관찰된다. 월간의 최신작 <멸망소녀나라>는 학교 폭력에 대한 복수 및 극복을 주요한 주제로 다룬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 동갑내기 여성과 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에서는, 로맨스의 전개와 병렬적으로 여주인공이 다른 여성 등장인물들과 연대하여 교내 집단 괴롭힘에 맞서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 다른 크리에이터 한예리의 작품 <너를 만나고 나서>에서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작품에서 이성애 로맨스가 주요하게 다뤄지지만, 여주인공이 폭력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남주인공이나 로맨스 관계가 직접적 역할을 하지 않으며, 스스로 폭력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멸망소녀나라>의 경우 마지막 장면에서 로맨스의 완성이 아니라, 몸이 바뀐 상황에서 학교 폭력에 함께 맞섰던 두 소녀가 재회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남성의존적 설정들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페토 드라마가 기존의 이성애규범성을 낭만화하는 모에 요소의 계보를 이어가면서도, 일부 영역에서는 10대 여성들이 위치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이 발견되기도 한다.
4-3 이중의 가상세계 속 다중인격화
지금까지 논의한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의 2층 구조에서 나타난 속성들을 바탕으로. 이 장에서는 제페토 드라마 창작 경험이 동반하는 정체성의 유동성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아즈마는 심층이 사라진 ‘초평면적’ 이야기 세계에서 나타난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다중인격’으로 제시한다[20]. 아즈마는 이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지 않았지만, 이는 곧 포스트모던의 파편화된 자아,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의 자아의 괴리,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적 온라인 구조 속에서 분열되는 자아 등에 대한 일반적 논의와 궤를 같이 한다. 본 연구는 아즈마의 다중인격론이 기존의 가상 세계 정체성에 대한 논의[29]-[31]와 상통한다고 보며, 이를 제페토 드라마에 적용하여 좀 더 확장해보고자 한다.
“또 다른 나 또 다른 세계”라는 제페토의 슬로건이 보여주듯, 메타버스 플랫폼으로서의 제페토는 가상 세계 속에서 아바타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제페토 드라마는 가상 세계에서 한 번 창조된 새로운 자아를 픽션 속에 위치시켜 이중의 가상화를 만들어낸다. 이중의 가상 공간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떤 필연적 이유나 정당성 없는 정체성 변환이 더욱 관습화된다. 이는 제페토 드라마 배우들의 경험 속에서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제페토 드라마는 개인 크리에이터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다른 이용자가 배우로 섭외되어 참여하더라도 제작 과정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하기보다는 크리에이터가 배우 캐릭터를 원하는 대로 소환해 촬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즉, 배우로만 참여하는 이용자의 경우 자신의 캐릭터를 크리에이터의 요구에 따라 커스터마이징한 후 빌려주는 것 이상으로 능동적 참여가 요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한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느끼는 재미에 대해 질문했을 때, 배우 인터뷰 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내향적 성격과 ‘전면에 나서는 경험’에 대해 언급했다. 즉, 자신의 성격과는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가 활동하게 하는 것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저는 주로 되게 밝은 역할에 지원해요. 장르나 이런 거 보고.. 내 캐릭터가 그렇게 나오면 좋고. [⋯] 저도 밝긴 한데요. 막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지 않잖아요, 보통. 약간 대리만족? 편집한 거 보면 내 캐릭터인데 약간 발랄하고 그러면 좋은 것 같아요. (I)
제가 좀 내성적이라서 그런 건[=직접 연기를 하거나 콘텐츠를 만드는 것] 못하고, 그냥 제 캐릭터가 하는 거니까.. 근데 결과물이 나오면 좋잖아요. (J)
크리에이터와 배우를 포함한 인터뷰 참가자에게 제페토 캐릭터로서 표현되는 성격과 실제 자기 성격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질문했을 때도 모두 제페토 플랫폼 내에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으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용자들도 실제 자신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제페토에서는 익명성과 더불어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허용하는 가상 세계의 논리를 바탕으로 현실 세계에서와는 다른 자아가 드러난다. 그리고 제페토 드라마는 이러한 정체성의 전환을 다른 이용자의 시각으로 한 번 더 해보도록 한다. 내가 창조한 나의 캐릭터가 크리에이터의 창작을 통해 또 다른 인물로 해석되고 만들어지는, 이중의 정체성 전환이 이루어지며 다중인격화된다.
아래는 연구자가 참여했던 제페토 드라마 제작 크루에서 개설한 오픈카톡방에서 이루어진 대화의 한 대목이다.
- 크루1: OO님 중성화하셨나
그래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 크루2: 어 저 중성캐[=중성 캐릭터]예요
여캐[=여자 캐릭터]로 쓸 때도 있음 - 크루1: OO님 솔직히 여자죠
- 크루2: 제 성별이 궁금하신가요
- 크루1: 눼
- 크루2: 말할까 말까
비공[=비공개]입니다 - 크루1: 악 이런 딱 봐도 남자나 여자군
드라마 속 배역은 성별이 명시되어 있고, 드라마 제작 참가자들은 모두 해당 배역에 맞는 성별 캐릭터를 가지고 진입한다. 그러나 오픈카톡방 안에서 크루원들의 실제 젠더를 알 수 있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아맞히는 대화가 종종 이루어진 적은 있으나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 나아가, 이런 대화가 정말로 상대방의 젠더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채 놀이처럼 행해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대화 속 ‘크루1’의 경우 드라마에서는 남성 역할을 맡았으나, 드라마 크루가 해체된 몇 달 후 계정에는 여성 캐릭터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계정에서 캐릭터 설정시 남성 또는 여성을 선택하게 되지만 머리 스타일을 비롯하여 신체를 여러 방식으로 변형함으로써 다른 성별로 보이게 하는 것이 용이하다. 또한, 배우 인터뷰 참가자인 H와 J의 경우 여성이지만 남성 캐릭터를 이용하고 있었고, 연구자 또한 다른 성별의 캐릭터를 만든 후 해당 성별의 역할에 지원을 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현실 세계에서의 젠더, 제페토에서의 젠더, 제페토 드라마에서의 젠더를 불일치시키며 다중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데이터베이스 소비란 모에 요소를 조합하는 과정, 그리고 그 조합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결과물 자체를 즐기는 것이고, 원본이나 심층에 대한 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용자들에게 실제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으며, 원본과 복제가 구별 불가능한 초평면의 세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가치와 일관된 거대서사는 지속적으로 미끄러져 해체된다.
더욱이 다중인격화는 아즈마가 이야기한 서사의 조락과 시뮬라크르로서의 캐릭터의 대두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크리에이터의 캐릭터 활용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드라마를 통해 형성한 인기를 바탕으로 제페토 내에서 가상의 자아를 가지고 라이브 방송이나 숏폼 콘텐츠 제작 등 다른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크리에이터 자체가 반(半)가상 인플루언서이자 하나의 콘텐츠 IP로서의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때 특기할 만한 점은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캐릭터를 사용할 때도 있지만, 자신이 제작한 드라마 속 캐릭터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교부 컨퍼런스에서 월간이 공개한 자기소개 영상 속에는 단발머리에 안경을 끼고 ‘월간’의 이니셜이 새겨진 옷을 입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 자신을 월간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이어서 공개된 그의 작품 <멸망소녀나라>에서 이 여성 캐릭터는 극중 주인공인 ‘이은동’으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가을>에는 마지막화에서 여주인공 설가을이 등장해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 인사는 설가을이 하는 내용이 아니라 설가을의 얼굴을 한 크리에이터 한예리의 인사이며 자막에도 ‘한예리’라고 소개된다. 특정 계기로 이미 얼굴을 공유한 바 있는 A 외에 모든 크리에이터 인터뷰 참가자들은 소위 ‘얼공(’얼굴공개‘의 준말)’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 있으며, 제페토 라이브방송이나 유튜브 영상, 다른 소셜 미디어 계정 속에서 드라마 속 캐릭터의 얼굴을 통해 팔로워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크리에이터들은 극 중 캐릭터에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하며 크리에이터와 주인공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이와 같은 다중인격화는 서사가 지닌 세계관이 붕괴되고 캐릭터가 서사로부터 자율화되는 양상을 동반한다.
종합하자면, 제페토 드라마에서는 하나의 캐릭터가 외모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양상과 더불어 하나의 외양으로 여러 인격을 오가는 양상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앞에서 논의한 시뮬라크르와 데이터베이스의 논리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다중인격화로 요약할 수 있다. 더욱이 메타버스와 드라마라는 두 가상·허구적 공간을 포개놓은 제페토 드라마에서는 특정한 캐릭터 및 이용자의 정체성에 구심점을 제공할 수 있는 심층의 힘이 희박하다. 이것이 어떻게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 또는 익명성과 관련된 부작용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본고가 집중하는 층위 너머의 다양한 효과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Ⅴ. 결 론
본 연구는 새롭게 부상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인 제페토 드라마의 속성과 드라마가 향유되는 방식을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통해 살펴보았다. 제페토 드라마는 서사의 짜임새보다는 캐릭터가 중시되는 시뮬라크르적 표층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시뮬라크르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베이스에는 제페토 드라마에서 유통되는 특유의 미학과 설정이 모에적 요소로 존재함을 발견했다. 제페토 드라마는 이러한 요소들을 다감각적 방식을 활용해 재조합하는 패스티쉬적 창작의 결과물이다. 또한, 가상세계의 아바타라는 가상적 존재와 드라마라는 픽션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이용자들은 다중인격과도 같은 다층적이고 유동적 정체성 놀이를 하고 있다.
본 연구는 제페토 드라마를 살펴보는 데에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활용함으로써 여러 개념을 더 확장, 굴절시켜 봤다는 점에서 이론적 의의를 지닌다. 아즈마가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을 제시한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 소비론과의 대비 차원이지만, 이 논의를 촉발시킨 주요 기반이 되는 것은 웹 2.0의 기술적 구조와 시각성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시기적 맥락이 2000년대 초반인 아즈마의 저서를 비롯해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이 적용되어 온 사례들 또한 대체로 서사적 차원에 주목하는 경향이 보인다. 반면 메타버스 플랫폼은 아즈마가 이야기한 초평면적 세계에 기술적으로 더욱 부합한 공간이다. 그리고 가상세계의 자원을 가져다 만들어진 제페토 드라마는 그야말로 과시적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러한 속성에 기반한 정체성 구축과 활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더불어 10대들의 놀이문화이자 하위문화로 여겨지는 영역의 미디어 실천과 감각을 읽어내는 하나의 사례 및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 점에서도 본 연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최근 메타버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축소된 것으로 보이나, 여전히 많은 제페토 크리에이터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제페토 드라마 또한 플랫폼이 제공하는 기술의 발전과 크리에이터들의 역량 향상을 통해 질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동안 뜨거운 주목을 받은 메타버스의 혁신성이 언론과 산업이 만들어낸 거품이라고 하더라도, 제페토의 주 이용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상상을 다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제페토를 활용하며 그들만의 창작물을 생성해내고 있다. 해당 세대가 지닌 문화적 감수성과 자기표현 및 소통 양식, 미디어 리터러시 등에 대한 파악은 이러한 실천에 주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 차원에서 본 연구가 담아내지 못한 영역을 본 연구의 한계이자 추후 연구 제안을 형태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본 연구는 제페토 드라마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생산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유통과 수용 차원에 대한 주목도 필요하다. 본 연구에서 수용의 측면은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이라는 관점에서 창작 행위 자체가 특정한 모에 요소의 소비라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조명되기는 했다. 그러나 온라인으로 공유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창작자와 수용자간의 실시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특징으로 삼고 있으며, 많은 크리에이터 인터뷰 참가자들이 제페토 드라마 창작의 큰 즐거움 요소 중 하나로 시청자들의 댓글을 볼 때라고 이야기한 만큼 수용의 측면은 중요하다. 연구자의 관찰과 크리에이터 인터뷰 참가자들의 응답을 고려할 때 제페토 드라마의 수용자들은 크리에이터들보다 연령이 어릴 것으로 추측된다. 제페토 드라마 수용자 연구를 통해서 유의미한 논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해당 연령대의 리터러시와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필요가 있으며 보다 윤리적으로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되기에 본 연구에서는 포함하지 못했다. 유통의 차원에서, 인터뷰에서 만난 여러 크리에이터들(A, B, C, F, G)은 유튜브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틱톡, 또는 트위터 중 하나 이상의 소셜 미디어를 제페토와 연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콘텐츠가 트랜스미디어적으로 유통되는 양상은 메타버스와 소셜 미디어 생태계를 아우르는 또 다른 미디어 실천이자 놀이로, 별도의 유의미한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본 연구는 제페토 드라마의 산업적 측면을 포괄하지 못했다. 인터뷰 참가자들 중에는 제페토 드라마 창작의 즐거움의 이유로 광고 제의나 수익 창출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미 소속사에 소속되어 직업적 의식을 갖고 활동하는 인터뷰 참가자도 있었다. 이로부터 하위문화적으로 향유되는 데이터베이스가 특정한 플랫폼의 알고리듬 논리 또는 특정 기업의 관리하에 놓일 때 어떤 변형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 문제는 디지털 주목 경제, 창의 노동, 플랫폼 산업 등의 또 다른 맥락 속에 위치 짓고 살펴볼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향후 제페토 드라마, 더 나아가 다종의 메타버스 환경에서 생산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주체화에 대한 더욱 복합적인 이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본 연구가 결여한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2021년 한국방송학회-GS리테일 특별연구비 지원’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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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2016년: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석사)
2020년: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박사)
2020년~2022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BK21 교육연구사업단
2022년~2023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2023년~현 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
※관심분야:문화연구, 대중문화, 디지털문화, 젠더, 인종